"히틀러도 관광상품".. 나치 독일로 휴가 간 침묵의 방관자들
"독일인은 청결·유능하다" 감탄
1937년 여행 간 미국인만 50만명
보이는 것만 보던 여행자들의 기록
학살·전쟁의 비극 대비시켜 지적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줄리아 보이드 지음|이종인 옮김|페이퍼로드|688쪽|3만3000원
“그 유명한 로렐라이를 지나가다. 님프는 흔적도 없고, 오로지 꼭대기에 나치 깃발만 나부낀다! 길에 쓰레기 바구니도, 쓰레기통도 없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구매하다. 사람들은 지극히 정직하다. 거스름돈을 세어볼 필요가 없다. 팁도 줄 필요가 없다. 여기에 온 이래 딱 한 번 유대인 가게를 봤는데, 그 가게를 이용하는 유대인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20세의 영국 청년 리스 존스는 1937년 8월 독일 라인강 연안 지역을 여행한 후 이런 일기를 남겼다.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한창이었지만 존스는 히틀러 치하 독일의 어두운 그림자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독일의 아름다운 경치, 친절하고 정직한 사람들에게 감탄할 뿐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400 m 달리기 금메달리스트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 아치 윌리엄스는 “그 추잡한 나치가 당신을 어떻게 대우했냐”고 묻는 언론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추잡한 나치는 하나도 보지 못했고, 그저 수많은 훌륭한 독일인들만 보았어요.”
당신이 만약 히틀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지기 전인 2차 대전 발발 이전의 나치 독일을 여행한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영국 작가 줄리아 보이드의 이 책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그는 나치 집권기 독일을 여행한 외국인들의 일기와 편지, 언론과 외교 문서, 미 발간 도서 등 수많은 ‘기록’을 조합해 여행자의 눈으로 본 ‘제3제국’을 생생하게 직조해 낸다.
나치는 국제주의를 증오했지만 프로파간다 도구로 관광이 유익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정부는 관광산업을 진작했고, 미국과 유럽인들은 독일로 휴가 여행을 떠나며 이에 부응했다. 1937년에 이르러 제3제국을 찾은 미국인 방문객 수는 연간 50만 명에 육박했다. 이들은 독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중세풍 건축에 매혹됐다. 간편한 옷차림으로 멋진 몸매를 드러내며 햇볕을 쬐고 있는 베를린의 청년들은 ‘모더니티’와 ‘활력’의 상징처럼 보였다. 1930년 휴가를 독일에서 보낸 미국인 에밀리 폴라드는 일기에 썼다. “독일은 모더니티를 추구하는 데 우리보다 훨씬 앞섰다.”
독일의 문학과 철학, 음악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수많은 관대한 부모가 자식들을 나치 독일로 보내 공부시켰다. 몰락한 귀족 부인들이 싼 값에 하숙을 쳤기 때문에 유학 비용이 저렴하다는 것도 큰 이유였다. 1930년대 뮌헨에는 귀족 부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며 신부 수업을 받는 ‘선량한 영국 여성들’이 넘쳐났다. 이 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나치즘에 빠져드는 이들도 있었다. 한 여성은 히틀러를 만난 후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너무 행복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역사가 아널드 J. 토인비의 맏아들 앤서니 토인비도 친(親) 나치 가정에서 하숙하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찰스 다윈의 손자며느리로 소녀 시절을 독일서 보낸 비디 발로는 회고록에 썼다. “자유로운 좌파 성향을 가진 부모들이 자녀들의 마음을 넓히기 위해 그들을 나치 독일로 유학 보낸 것이 1930년대의 역설이었다.”
저자는 “유대인 박해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면 그건 곧 미국 흑인 문제와 자동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미국인 관광객들이 인종차별 문제를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나치는 볼셰비키 및 볼셰비키와 결탁한 유대인과 싸우는 외로운 투사라는 인식도 있었다. 괴벨스가 기획한 ‘책 화형식’에도 일부 언론인만 분노했을 뿐이었다. ‘피와 땅’이라는 나치의 구호가 어떤 지식인들에겐 단순 소박한 시절로 되돌아가자는 간절한 호소로 들렸다. “장-폴 사르트르는 장학금을 받아 9개월 동안 베를린에 머물렀으나 이 시기 그의 일기와 시몬 드 보부아르와 주고받은 편지들은 인멸(湮滅)되었다. 나치에 의해 책 화형식을 당했는데도 서머싯 몸은 그의 애인 앨런 설과 함께 뮌헨 페스티벌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저자는 히틀러의 독재와 유대인 탄압 같은 독일의 위기 상황이 외국인 관광객들에겐 독일을 더욱 매력적인 여행지로 만들어주는 요소였다고 말한다. 1930년대 중반 국경을 넘어 독일로 들어가려는 여행자가 처음 내려야 하는 결정은 ‘하일 히틀러’를 소리쳐야 할지 말지였지만, 많은 여행객이 게임처럼 이를 즐겼다. 저자는 이 ‘침묵의 방관자’들이 결국 나치즘의 ‘공모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런 여행자들의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는 가장 오싹한 사실은 많은 점잖은 사람들이 히틀러의 독일에 찬사를 보내며 그들 나라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나치의 악랄함은 독일 사회의 모든 측면에 이미 스며들어 있었지만, 그 악행이 외국인 방문객들에게는 여전히 허용되는 매력적인 즐거움과 뒤섞여 정체가 모호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본질은 벌레 먹은 장미처럼 아주 흉측한 것이었다.”
무심함이 낳은 이러한 잔인함이 비단 제3제국 여행객들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제3세계를 여행하며 빈곤을 관광상품 삼는 현재의 우리는 과연 무결한가? 해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곱씹게 하는 책으로 2019년 LA 타임스 역사 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원제 Travellers In The Third Re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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