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벙커의 문을 열자 별세계가 펼쳐졌다… 지중해의 찬란한 햇살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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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명 인증한 미디어아트
‘빛의 벙커’에서 연휴 즐기기+주변 먹거리·볼거리
‘강을 거슬러 오르던 어부가 길을 잃었다. 홀연 분홍 꽃잎 흩날리는 향긋한 복숭아나무 숲에 들어섰다. 숲길을 걸어 들어가니 그 끝에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에 들어서자 갑자기 시야가 밝아지며 아름답고 평화로운 농촌이 나타났다. 전란(戰亂)을 피해 이곳에 들어온 주민들은 수백 년 동안 바깥 세상과 단절된 채 불로불사의 신선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마을에서 며칠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부에게 주민이 말했다. 우리 마을에 대해 절대 말하지 말아주시오.’ 조선 초기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 등 수많은 그림의 주제가 된 무릉도원(武陵桃源)이 탄생한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압축한 내용이다.
제주에서 열리고 있는 몰입형 미디어아트 ‘빛의 벙커’전에서 무릉도원을 찾은 어부가 된 기분이었다. 태풍 ‘찬투’가 제주도에 근접한 지난 13일, 강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지는 우울하다 못해 무섭기까지 한 날씨와 대비되면서 전시장은 그야말로 바깥 세상과 단절된 별세계처럼 느껴졌다.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한참 떨어진 대수산 산기슭 좁은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빛의 벙커’가 나온다. 산자락을 파고 든 것처럼 보이는 무채색 콘크리트 건축물의 동굴 같은 입구를 지나 전시장에 들어서면 깜짝 놀랄 반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잠시 어두운가 싶더니 시야가 갑자기 밝아지면서 모네(Monet), 르누아르(Renoir), 샤갈(Chagall) 등 주로 지중해에서 활동한 화가들의 작품 500여 점이 밝고 화사한 빛깔로 동굴 속을 물들인다.
프랑스 인상주의 창시자 클로드 모네가 오랫동안 머물며 화폭에 담은 지중해 항구 앙티브(Antibes)의 바다 풍경이 벽을 스치며 지나간다. 이어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묘사한, 식물과 풍성한 나체 여인이 있는 에덴동산 같은 프로방스 풍광이 바닥을 훑는다.
이들 작품에 영향받아 서정적이고 색채감 넘치는 곡을 작곡한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조지 거슈윈,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등 클래식·재즈 거장들의 음악이 미디어아트로 구현되면서 관람객의 시각과 청각을 동시다발로 자극한다. 마치 그림 속 인물이 되어 지중해를 걷는 듯하다.
내년 2월 28일까지 선보이는 ‘모네, 르누아르… 샤갈, 지중해의 화가들’은 ‘빛의 벙커’에서 선보이는 3번째 전시다. 모더니즘 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한 화가들의 작품들을 디지털로 재구성해 관람객을 인상주의부터 모더니즘까지 인도하는 여정을 6개 시퀀스(차례)로 구성했다.
‘빛의 벙커’는 지난 2018년 11월 ‘클림트’전으로 개관해, 2019년 12월 ‘반 고흐’전까지 2년 만에 관람객 100만명을 돌파하며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 랜드마크이자 ‘인증샷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전시관은 실제 벙커로 사용되었던 공간이다. 1980년대 정부가 국가 기간 통신망 운용을 위해 한국과 일본, 한반도와 제주도 사이에 구축한 해저광케이블을 관리하던 곳이다. 900평 규모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을 세우고 흙으로 덮고 나무를 심어 산자락처럼 보이게 위장했다.
이 벙커를 전시 공간으로 고쳤다. 외부의 빛과 소리로부터 완전히 차단돼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 공간으로 최적화됐다. 자연 공기 순환 방식을 활용해 섭씨 16도 쾌적한 온도와 습도를 연중 내내 일정하게 유지한다.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미로와 같은 진입로가 나온다. 관람객의 기대감과 몰입도를 높이는 장치다. 곧이어 가로 100m, 세로 50m, 높이 5.5m의 내부가 전모를 드러낸다.
무릉도원에 처음 들어선 어부처럼 흥분한 관람객들은 사진과 영상을 찍느라 정신없다. 돌아가며 서로 인증샷 찍어주는 친구들부터 팔을 쭉 뻗어 셀프샷 찍는 장년 부부, 가족 사진 찍어 달라고 부탁하는 아버지, 삼각대에 스마트폰을 고정시켜 세워 놓고 맞은편 벽에 기대 앉아 셀프 영상을 촬영하는 연인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판타지 세계를 여행하는 관람객들의 종착지는 가로 벽 앞. 영상이 폭 100m 벽면을 가득 채우며 흐르는 전시의 하이라이트이자 메인 무대다. 벽 맞은편에 기둥과 작은 벽들이 있고 이곳에 기대거나 주저앉은 관람객들이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전시를 관람한다.
35분간 이어지는 본 전시, 그리고 이어지는 10분짜리 기획 프로그램 ‘파울 클레, 음악을 그리다’를 다 보지 않고 중간에 일어서는 관람객은 거의 없다. 무릉도원을 떠나기 싫은 어부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관람 요금 성인 1만8000원·청소년(14~19세) 1만3000원·아동(8~13세) 1만원, 관람 시간 오전 10시~오후 7시(4~9월·입장 마감 오후 6시)
“뼈삼겹 돔베, 말고기 튀김, 오메기 베이글 먹엉… 비자림 걸어보카마씸?”
‘빛의 벙커’ 주변 먹거리+볼거리
‘빛의 벙커’가 자리한 제주도 동쪽 끝, 성산포 인근은 식도락가들 사이에서 회자될 만한 식당이 제주도 서·남·북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매년 제주를 대표할 만한 식당 200곳을 선정·발표하는 ‘제주푸드앤와인페스티벌(JFWF)’ 관계자는 “올해 새롭게 선정된 맛집 40곳 중 13곳이 서귀포 동부권에서 나왔다”며 “제주 6개 권역 중 가장 많다”고 했다. 지역별 맛집은 JFWF 홈페이지(jfwf.kr/gourmet/week2021)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빛의 벙커에서 11㎞가량 떨어진 불특정식당은 식당이라곤 있을 법하지 않은 외진 곳에 눈에 띄는 간판도 없다. 낡은 감귤선과장 건물 옆면에 난 낮은 문으로 들어가면 의외로 넓은 공간이 나온다. 이 공간을 꽉 채운 ㄷ자형 바 테이블에 예약한 손님이 모두 앉으면 식사가 시작된다.
정해진 메뉴는 없다. 다양한 요리 경력을 가진 요리사들이 만드는 음식은 한·중·일·양식 등 어떤 스타일인지 특정하기 어렵다. 그날그날 가장 좋은 재료로 변화무쌍한 요리들을 오마카세 스타일로 낸다. 100% 예약제로, 술을 한 잔씩은 주문해야 한다. 1·2부로 진행되는 점심 3만5000원, 저녁 6만원.
말이는 맥주와 어울리는 분식 메뉴를 낸다. 제주 조랑말 등심을 얇게 저며 튀긴 ‘제주 말고기 튀김’(2만3000원), 흑돼지 등심과 매콤한 넙적당면이 들어간 ‘흑돼지 등심 매콤 김말이’(7000원), ‘한치 한마리 통튀김’(1만6000원) 등 제주 특산물을 이용한 튀김이 많다. 해물, 야채, 소고기를 각각 넣은 ‘김말이 모둠세트’(1만6000원)가 대표 메뉴. ‘떡볶이’(5000원)도 있다. 분말수프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뽑은 국물에 끓이는 ‘해물라면’(9000원)이 시원하다.
성산포 인근에서 숙박했다면 아침 식사로 시흥해녀의집 조개죽(1만원)을 추천한다. 시흥리는 제주에서 드물게 갯벌이 있어 조개가 난다. 조개를 듬뿍 넣고 끓인 죽이 속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해장용으로도 그만이다. ‘전복죽’(1만2000원)도 물론 있다.
모닝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성산포 플레이스캠프 안에 도렐이 있다. 고소한 땅콩 크림과 쌉쌀한 에스프레소 커피를 우유에 얹은 ‘너티 클라우드’(6000원)가 대표 메뉴. 매콤한 체다치즈를 먹물 빵에 넣어 현무암 모양으로 동그랗게 빚은 ‘블랙치스톤’(4500원)이나 오메기와 쑥을 섞어 구운 ‘제주 오메기 베이글’(3800원)을 곁들이면 아침 한끼로 충분하다.
오른은 요즘 가장 ‘핫’한 제주 카페 중 하나다. 영어 상호 ‘orrrn’을 음각으로 새긴 노출 콘크리트 건물 외관부터 감각적이다.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계단형 좌석이 명당. 인증샷만 찍고 가는 이들이 많은지, 주문받는 종업원이 “1인당 음료를 하나씩 주문해야 한다”고 했다. 20~30대로 바글바글해서, 중장년층 이상은 불편할 수 있다. 오른 라테 8000원, 엑설런트 라테 7500원.
빛의 벙커와 제주 시내 중간쯤 되는 지점에 블루보틀이 들어섰다. 오전 10시 도착했는데 빈 좌석이 딱 하나 있었다. 아이폰을 카페로 구현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블루보틀 특유의 미니멀한 공간 자체로 만족스럽고, 통창 너머 보이는 숲 풍광마저 왠지 정원사가 다듬어 놓은 듯하다. 진한 라테라고 하면 이해가 쉬운 ‘지브랄타’ 5500원, ‘제주 블렌드’ 드립 커피 5200원. 제주점에서만 파는 ‘제주녹차 땅콩 호떡’(7100원)은 일찍 품절된다.
제주도감과 모던돔베는 제주 대표 음식인 삶은 돼지고기를 도마(돔베)에 올리는 돔베고기와 돼지 육수에 국수를 넣은 고기국수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돋보인다.
제주도감은 낭푼밥상을 운영하는 양용진 제주향토음식보존연구원장이 새롭게 열었다. 양 원장은 “도감은 혼례나 잔치 때 돼지를 잡아 요리하고 나눠주는 모든 일을 주관하던 장인”이라며 “과거 도감들이 하던 방식 그대로 돼지고기를 조리한다”고 했다.
삶은 돼지고기를 목살·오겹살·갈비살·덜미살·뽈살·두항정살 등 부위별로 맛볼 수 있는 ‘도감’(3만·4만5000원)이 대표 메뉴. 놀랍도록 육즙이 촉촉하고 잡내가 없다. 식어도 맛있다. 매장에서 직접 뽑은 메밀국수를 돼지고기 육수에 말아 내는 ‘제주메밀고기국수’(9000원)는 밀가루 국수를 쓰는 일반 고기국수를 한 차원 업그레이드한 맛이다.
지난 8월 문 연 모던돔베는 돔베고기를 구이 형태로 재해석했다. ‘바삭 뼈삼겹 돔베’(3만9000원)와 ‘바삭 뼈등심 돔베’(3만3000원)는 3주간 건·습 교차 숙성한 흑돼지 삼겹살과 등심을 그릴에 살짝 자국 나게 미디엄으로 구워 낸다. 한라산처럼 생긴 자그마한 돌판에 더 익히거나 데워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자가제면한 메밀국수를 돼지 육수에 말고 숯불에 구운 얇은 삼겹살을 올린 ‘듬박제주고기국수’(1만3000원)는 평양냉면집의 온면과 일본 라멘을 합친 듯한 맛이다. ‘듬박장비빔국수’(1만5000원)는 제주 콩장으로 만드는 소스와 메밀면의 조화가 인상적이다.
스누피가든은 “아이들 때문에 갔다가 부모가 더 재밌어 한다”고 소문났다. 둥근 머리 소년 찰리 브라운과 그의 똑똑한 개 스누피 등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들이 등장해 70년 넘게 사랑받고 있는 미국 만화 ‘피너츠’를 주제로 한 체험 테마 가든.
피너츠와 등장인물들을 잘 몰라도 충분히 즐겁다. 실내 전시장도 좋지만 실외 가든이 대단하다. 웬만한 수목원 못잖다. 관람 시간을 2시간 정도로 충분히 잡길 권한다. 성인 1만8000원, 청소년 1만5000원, 아동 1만2000원.
하늘 높고 바람 쾌적한 가을의 제주는 숲 걷기에 최적이다. 빛의 벙커에서는 거문오름과 비자림이 가깝다. 천연기념물 444호이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거문오름은 탐방 희망일 전달 1일 오전 9시부터 선착순으로 예약받는다. 당일 예약은 안 되고, 제주안심코드 앱을 설치해야 하는 등 찾기가 까다로운 편이다. 천연기념물 374호인 비자림은 입구에서 바로 표 사서 들어갈 수 있다. 거문오름 성인 2000원·아동 1000원, 비자림 성인 3000원·아동 1500원.
이 밖에 성산일출봉, ‘아주 깊다’는 뜻의 제주말 ‘만쟁이거머리굴’이라 불렸던 만장굴, 함덕해수욕장, 성읍민속마을 등이 빛의 벙커에서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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