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 5년.. "큰 도둑은 못 잡고 9700원짜리 식혜만 잡았다"

허윤희 기자 2021. 9. 1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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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시행 5년 맞은 청탁금지법
우리 사회 어떻게 바꿨나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14일 여의도 더현대 서울 식품매장에서 한 여성이 한우 선물 세트 코너를 둘러보고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올해 초 승진한 중앙 부처 공무원 A씨는 사무실로 온 축하난(蘭)을 다 돌려보냈다. “선물한 사람 마음을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일일이 전화해서 가격을 확인할 수도 없고, 괜히 1만~2만원 초과해 ‘김영란법’ 위반하는 것 아닌가 찜찜했다”는 것이다. 시청 공무원 B씨는 “식사 자리가 있으면 장소 잡을 때부터 밥값을 따지게 된다”며 “업무 관련 민원인에게 밥을 얻어먹거나 선물 받는 문화는 거의 없어졌다”고 했다.

일명 ‘김영란법’이라는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이 28일로 시행 5년을 맞는다. 이 법 도입 목적은 ‘공직자의 공정한 직무 수행’과 ‘공공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 확보’(제1조). 그러나 법의 파급 효과가 공직자·공직기관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전 국민의 생활상을 바꿀 것으로 예상되면서 입법 과정부터 수많은 논의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김영란법 5년,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불필요한 접대 문화 사라졌다

<아무튼, 주말> 취재에 응한 공무원·기업인·교사·학부모들은 “법 시행 전과 비교해 문화가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며 “과도한 접대와 선물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인식은 뿌리를 내렸다”고 입을 모았다. 국민권익위원회 2019년 설문조사 결과 일반 국민의 79.5%가 “종전의 선물 및 접대 관행을 부적절하게 생각하게 됐다”고 답했다.

기업의 접대비 지출은 3년 만에 27% 줄었다. 국세청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매출액 1000억원 초과 대기업·중견기업 4125곳의 접대비는 총 2조6265억원. 3년 전보다 법인 수는 623곳(17.8%) 늘었지만 접대비는 26.9% 감소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판공비가 40% 이상 줄었다. 저녁보다 점심 미팅으로 돌리고,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2차, 3차까지 가지 않고 1차에서 간단히 먹고 끝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고 했다.

학교도 달라졌다. 서울시교육청이 2017년 교직원 1만8101명, 학부모 3만6947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교직원의 85%, 학부모의 83%가 ‘법 시행 1년 만에 촌지 등 금품 수수 관행이 사라졌다’고 답했다. 중학교 2학년 딸을 둔 김모(41·서울 양천구)씨는 “담임한테 성의 표시는 해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있다가 우리 아이만 차별당하는 게 아닐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편법과 꼼수도 만연 “신고만 안 하면 돼”

하지만 일각에선 “신고만 안 하면 되고 일일이 추적할 수도 없는데 사실상 사문화한 법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권익위에 따르면 지난해 말까지 김영란법 위반 신고 사례는 총 1만735건. 시행 첫해 1568건에서 2018년 4386건으로 늘었다가 이후 3020건, 1761건으로 줄고 있다. 법망을 피하는 수법이 진화하고 있는 데다 법의 실효성이 떨어진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한 공직자는 “초반에야 시범 케이스로 걸릴까 봐 다들 조심했지만 솔직히 요즘 누가 3만원 따지면서 밥을 먹느냐”며 “밥값이 3만원 넘으면 식사 인원을 부풀려 서류를 꾸미는 식으로 편법과 꼼수를 동원한다”고 털어놨다.

실제 청탁금지법을 위반해 형사처벌 및 과태료·징계부가금 등 처분을 받은 사람은 작년까지 1025명으로 전체 신고 처리의 6%에 불과하다. 이마저 과태료 처분(679명)이 대부분이고 형사처벌은 110명뿐이라 솜방망이란 지적도 나온다. 이에 대해 권익위 관계자는 “청탁금지법의 취지는 처벌이 아니라 예방이다. 공직자들의 윤리 의식을 높이고 잘못된 관행을 바꾸어 청렴 문화를 뿌리 내리게 하자는 게 애초 취지”라며 “법이 시행되던 2016년 우리나라 국가 청렴도가 세계 52위였는데 지난해 33위로 올랐다는 게 우리 사회 청렴 의식이 높아졌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9700원짜리 식혜 보냈다고 2만원 과태료

그러나 김영란법이 공직 사회의 부패 예방에 큰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사립대학 50대 교수는 “조국 사태나 LH 부동산 투기 사태, 수산업자 사건 등을 봐라. 정작 법이 필요한 곳은 여전히 썩어 있는데, 전 국민만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면서 미풍양속까지 제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민권익위원회가 펴낸 ‘청탁금지법 주요 판례집(2020)’을 보면 음료수 돌렸다가 과태료 처분 받은 사례가 상당수 나온다. 산업 재해 요양급여 승인 결정을 받은 사람이 공단 담당자에게 식혜 24캔이 든 9700원짜리 상자를 보냈다가 과태료 2만원 처분을 받았고, 어떤 학부모는 담임교사에게 1만2700원짜리 모바일 기프티콘을 선물했다가 과태료 3만원 처분을 받았다.

국내 농축수산업계·화훼업계 등은 직격탄을 맞았다. 박운호 한국화원협회장은 “봄철 학급 미화용으로 학부모들이 보내던 꽃 수요는 이제 씨가 말랐고, 인사 철 승진이나 임용 축하 화분은 반송되는 경우가 많다. ‘5만원 이하라 김영란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공문을 보내는데도 한번 위축된 심리가 나아지지 않는다”고 했다. 전복 생산·유통업계도 이 법이 현실에 맞지 않는다며 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한국전복산업연합회 등은 “값싸고 질 낮은 외국산이 내수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데다 코로나 사태까지 겹쳐 농축수산업계는 붕괴 직전”이라며 “고급 선물용으로 파는 전복, 굴비, 갈치 등은 청탁금지법에서 정한 기준으로는 도저히 생산 단가를 맞출 수 없다”고 했다.

인천의 한 초등학교 교사는 “스승의 날에 학생 몇 명이 꽃과 편지를 가져왔는데, 편지는 받고 꽃은 사진만 찍고 돌려보냈다”며 “사제 간에 나누는 정을 법으로 금지하는 게 안타깝다. 부정부패 잡으려다가 카네이션만 잡은 게 아니냐”고 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민들이 널리 인식하고 있는 만큼 법 기능은 충분히 발휘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공직 사회의 청렴성을 보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공직자 사회의 내부 고발이 더 활발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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