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그린·스마트·미래로 포장한 ‘교육 농단’

김미리 주말뉴스부 차장 2021. 9. 1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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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조 예산 쓰는 교육계 뉴딜?
학교 부수고 새로 짓는다면서
여론 수렴 없이 어물쩍 통보
모델하우스 없이 재건축하는 격
지난 15일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열린 '그린스마트 미래교육' 사업 철회 집회에서 학부모들이 설치한 근조 화환이 쓰러져 있다. /김미리 기자

지난달 25일, 아이 중학교의 온라인 가정통신문 ‘e알리미’가 울렸다. 바로 다음 날 예정된 교육부와 서울시교육청의 ‘그린스마트 미래학교’ 온라인 정책 토론회를 시청하라는 안내였다. 급조된 행사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린, 스마트, 미래. 세 단어 조합을 보며 디지털 정책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통신문 저 아래 ‘개축 대상 학교’라고 슬쩍 넣은 한 줄은 뒤늦게 봤다.

그 주말, 조용하던 동네가 들끓었다. 아이 학교뿐만 아니라 담장 맞댄 초등학교 교문이 “그린스마트 결사반대”라고 써 붙인 근조 화환으로 뒤덮였다. 알고 보니 그린스마트 미래학교는 정부가 5년간 18조5000억원을 투입해 40년 이상 된 전국 학교 1400곳을 개보수하는 사업이었다. 두 학교는 지난 6월 개축 대상으로 결정된 상태였다. 40년 넘은 동네 학교 두 개를 나란히 부수기로 했는데, e알리미 공지를 받기 전까지 학부모 누구도 몰랐다. 학교 측은 단 한 마디 설명도 없었다.

“공사하는 2~3년 동안, 5t 트럭이 오가는 공사판 옆 운동장에 설치된 모듈러 교실(임시 교실)에서 아이들이 수업해야 한다” “전학 가야 할지 모른다”는 얘기가 돌았다. 아이 셋을 키우는 이웃은 “전세가 몇 억이나 올라 이사 갈까 고심하다가 학교가 가까워 얼마 전 재계약했다”며 “공사판으로 애들을 보낼 판”이라며 분통 터뜨렸다. 교육청도, 교육부도 똑 부러진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 그사이 초등학교 교장은 정년 퇴임을, 중학교 교장은 전근 가버렸다. 답답한 학부모들이 단톡방을 만들고, 커피숍에서 반대 서명을 받고, 아파트에 전단을 돌렸다.

지난 2~3주 동안 서울 시내 곳곳에서 비슷한 상황이 속출했다. 서울시교육청이 2021~2025년 개축 대상으로 선정한 학교 93곳 중 13곳만 학교운영위원회 의견 수렴을 거쳤다고 한다. 나머지는 대부분 8월 말 일방 통보했다. 뿔난 부모들이 움직였다. 서울 연희초·여의도초·신용산초·언북초 등 서울 시내 학교 10여 군데 학부모들이 연합해 사업 철회를 주장했다. 교육 당국과 일부 여당 시의원은 “우리 아이 때만은 절대 안 된다”는 식의 학부모 이기주의로 몰아갔지만, 지난 15일 서울시교육청에서 열린 집회에서 만난 학부모들은 “소통 없는 졸속 행정”에 분노했다. 결국 그날 오후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철회를 요청한 학교 9곳을 사업 대상에서 제외했다.

집회 현장에서 하마터면 얼렁뚱땅 넘어갈 뻔한 매머드급 졸속 사업을 공론화시킨 학부모를 만났다. 서울 대곡초 학부모회장 김나형(46)씨였다. 몇 해 전 혁신학교 소동을 치른 뒤부터 학교 일을 꼼꼼하게 모니터한다는 김씨는 지난 6월 16일 ‘교과 만족도 평가’를 묻는 가정통신문 맨 아래 ‘그린스마트 미래학교 리모델링 선정’이라고 뜬금없이 적힌 한 줄을 봤다고 한다. 이후 교육청에 정보 공개를 요청하는 등 한 달 동안 집요하게 파고들다가 ‘선(先) 선정 후(後) 계획’이라는 이 사업의 허술함을 발견하고는 근조 화환 보내기 등을 시작했다. 대곡초는 이미 7월에 리모델링 대상에서 빠졌지만, 그는 “허점투성이 정책에서 우리 아이만 빠져나올 순 없단 생각으로 나왔다”고 했다.

이것이 기자가 지난 20여일간 한 학부모로서 경험한, 건국 이래 최대 규모 교육 사업이라는 ‘그린스마트 미래 학교’의 황당한 민낯이다. 정부는 ‘교육계의 한국판 뉴딜’이라고 강조하지만, ‘불도저식 학교 공사 사업’에 가까운 듯하다. 건설사가 1400가구 아파트 단지를 재건축·재개발하면서, 주민 설명회나 모델 하우스 하나 없이 날림 공사하는 격 아닌가. 그나마 건설사 대표는 부실 책임이라도 지지, 교육 정책엔 책임진 사람이 있었던가.

지난 15일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그린스마트 미래교육' 사업 철회를 주장하는 학부모들. /김미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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