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희 "WTO 사무총장 도전이 실패? 후회 없다, 가능성을 봤다"

곽창렬 기자 2021. 9. 18.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곽창렬 기자의 열창]
'통상 외길 30년' 마감한 유명희 전 통상교섭본부장

작년 8월, 유명희(54) 당시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회의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제가 아들이 하나 있어요. 중국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인데요, 무슨 밴드를 한다며 공부 안 하고 베이스 기타 치면서 돌아다녔어요. 하도 속이 상해서 아들 잡으러 베이징 시내에 있는 한 록카페에 갔어요. 아들이 속한 밴드가 연주하고 있었는데, 드럼은 스위스 사람이 두드리고, 노래는 러시아 친구가 부르고, 또 다른 기타는 프랑스 학생이 치더라고요. 이들이 만들어 내는 화음이 아주 아름다웠어요. 저와 대한민국도 이 밴드처럼 세계 무역 무대에서 좋은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지난 3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유명희 전 통상교섭본부장. 그는 30년 공직 생활을 마친 뒤 맛본 백수 생활에 대해 “평소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걸 좋아하는데, 일 때문에 도중에 끊기는 경우가 있어 속상했다. 원없이 책을 볼 수 있게 돼 좋다”고 했다. 인터뷰 한 나흘 뒤 유명희는 정부의 경제통상 분야 외교 활동을 지원하는 경제통상대사(임기 1년)로 임명됐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해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이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전망은 밝지 않았다. 유 본부장 외에 영국·멕시코·나이지리아 등 여덟 나라가 후보를 냈는데, 그들에겐 지원군이 많았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유명희에게 공개 지지를 선언하며 반전되는 듯했지만, 마지막 관문을 넘는 데 실패했다. 이웃한 일본, 그리고 미국을 견제하려는 중국의 반대가 발목을 잡았다. 유명희를 밀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한 것도 악재였다. 그러나 해외 통상 전문가들 사이에선 “위대한 도전”이란 평가가 나왔다.

유명희는 ‘대한민국 통상의 역사’라고 한다. 30여 년 공직 생활 대부분을 통상 분야에 몸담았다. 한미 FTA 최초 협상을 실무자로 경험했고, 10여 년 뒤 수석 대표가 돼 재협상을 이끌었다. 아세안, 인도네시아, 싱가포르와 FTA 타결도 일궜다. 한미 FTA 재협상 파트너였던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전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는 그에게 “미국 정부에 와서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건네며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지난달 6일 그는 산업통상자원부 70여 년 역사에 첫 여성 차관, 사상 첫 여성 통상교섭본부장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공직을 떠났다. 3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유명희는 “앞으로 세계는 디지털, 친환경 분야 등에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 규칙을 만들게 되는데, 우리나라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국익을 끌어올릴 수 있다. 다음 정부는 이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실패했다고? 실패 안 했다”

-왜 사무총장 당선에 실패했다고 생각하나.

“실패가 아니다. 나는 마지막에 후보직을 내려놓을 때도 떨어졌다기보다는 뿌듯하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지난달 내가 통상교섭본부장을 그만둘 때도 여러 나라 통상 장관과 전문가한테 많은 메시지를 받았다. 상당수가 작년 WTO 선거 과정이 훌륭한 캠페인이었다고 말해주더라. 한국이 국제 무대에서 더 큰 역할을 할 준비가 돼 있음을 선거 과정에서 보여줬다고.”

-미국의 절대적 지지가 있었는데…

“처음부터 쉽지 않은 선거였다. 선거판에 비유하자면 나는 무소속 신분이었다. 왜냐면 현 WTO 사무총장인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는 아프리카 소속 WTO 회원 44나라의 절대적 지원을 받았다. 스페인어를 쓰는 중남미에서는 중남미 출신 후보를 우선 밀었다. 미국이 중요한 건 분명하지만, WTO는 유엔처럼 분담금을 많이 내는 나라의 입김이 강한 게 아니라, 164국이 동등하게 표를 갖고 있다.”

지난해 7월 WTO 사무총장 후보로 나선 유명희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WTO 본부에서 정견 발표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선거 준비가 어려웠나.

“발로 뛰어서 한 명 한 명 만나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20년 이상 외교관 생활 하면서도 직접 접촉한 나라가 몇 십 곳 안 된다. 그런데 선거 과정에서 100명이 넘는 각국 통상 장관과 만나거나 통화했다. 개발도상국에는 ‘우리도 이렇게 열심히 하면 한국처럼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줬고, 선진국에는 한국이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 집안 얘기도 했다. 아버지가 10여 년간 중동에서 일하셨다. 20대 후반인 아들은 케이팝(K-pop) 해외 공연 기획자다. 3대에 걸친 우리 가족의 스토리에서 한국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 쪽에 붙는 국가가 많아지더라. 처음엔 지명도가 제일 떨어지는 후보였지만, 언더독 효과(경쟁에서 지고 있는 사람이 이기길 바라는 현상)가 일어났다.”

◇통상 협상, 익숙하고 편함을 경계하라

그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35기)에 합격해 1991년 총무처(현 행정안전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1994년 통상산업부로 옮겨 30년 가까이 통상 분야에서만 일했다. 2000년대 중반 한미 FTA 첫 협상 때는 과장급으로 참여했고, 2018년에는 수석 대표로 한미 FTA 재협상을 타결시켰다.

-왜 통상을 선택했나.

“우루과이 라운드의 농산물 개방 협상 때문에 시끄럽던 시절이다. 그때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칼라 힐스라는 여성이었는데, 한국에 와 터프하게 시장 개방을 요구하며 활동했다. 그 모습이 통상 업무를 담당하던 공무원들에게 강한 인상으로 남았다. 우리나라는 통상 협상에 나서면 모두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성으로만 대표단을 구성했으니까. 그래서 당시 통상산업부가 우리도 여성 통상 전문가를 키울 필요가 있다며 다른 부처 젊은 여성 사무관을 뽑겠다고 나섰다. 원래부터 통상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나에게 기회가 왔다. 나를 포함해 여성 사무관이 3명 선발됐는데, 결국 나만 이 길을 걸었다.”

-통상은 나라끼리 물품을 사고판다는 의미인데, 재미가 있나.

“공무원으로 국내 업무를 하면, 성과가 피부에 와 닿는 경우가 많다. 받쳐 주는 산하기관도 있고, 시스템이 잘돼 있어 상대적으로 편하게 일할 수 있다. 그런데 통상은 다르다. 철강이나 농산물 협상에 들어가면 우선 국내 기업과 농민 단체 등 다양한 단체의 이해관계를 조정해야 한다. 겨우 조정을 마치고 나서 바깥으로 나가면 우리는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다른 나라의 예상치 못한 행태로 판이 달라지면 매우 급하게 대응해야 한다. 혹시 협상을 하다 잠시라도 중요한 것을 놓치면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는 언어나 문화를 공유하는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한번은 캐나다 대표가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 회의 시간에 못 맞춰 오는 상황이 생겼다. 그랬더니 캐나다 주장을 호주가 대신 읽어주더라. 두 나라 모두 농산물 강국이고, 영국 연방에 속한 나라라는 점이 작용한 것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협상할 때 어떤 마음가짐과 전략을 갖고 나서나.

“2018년 한미 FTA 재협상 할 때 내 상관이었던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 라이트하이저 대표에게 ‘유명희 때문에 힘들어 못살겠다’고 농담을 했다. 우리는 무슨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경우 자기가 좋고 편한 대로 생각하고 대비하기가 쉽다. 이를 ‘집단 사고’라고 하는데 통상 협상을 할 때는 반드시 멀리해야 한다. 우리나라 농민과 기업, 소비자 단체를 만나 의견을 듣고, 치열하게 조율해도 밖에 나가면 우리가 생각한 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가 훨씬 많다. 상대방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내부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한미 FTA 재협상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미국이 치고 들어올 수 있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런 상황을 가정해 상관인 김 본부장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돼 한미 FTA 재협상 문제를 꺼내고 나왔을 때, ‘그건 선거운동 기간에 했던 얘기고, 시간이 지나면 압박이 완화될 수 있으니 지연시키는 게 좋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난 미국이 중간선거 전에 적은 범위에서라도 성과를 내려고 할 것이니, 이 타이밍에 타결하면 오히려 큰 피해 없이 넘어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2018년 1월에 협상을 시작해 석 달 만에 마무리했다. 당초 미국이 일방적으로 많은 걸 요구했지만, 이를 대폭 줄여서 다섯 가지 정도만 주고받고 협상을 끝냈다. 또 미국의 요구 정도나 전략이 모두 우리가 했던 시뮬레이션 범위 내에 있었다. 이후 미국과 협상에 들어간 일본이나 캐나다·멕시코는 미국에 훨씬 더 많이 양보했다.”

-우리가 통상 분야에서 보완해야 할 점이 있다면.

“우리나라는 경제력이나 인구, 문화 등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나라다. 그런데 여전히 국제 무대의 역할은 부족하다. WTO만 봐도 우리가 내는 돈은 164회원국 가운데 여덟째로 많은데, 전체 직원 640명 가운데 한국인은 고작 4명이다. 직원은 분담금이 아니라 실력으로 뽑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 한국인들이 국제 무대에서 더 많이 활동할 수 있도록 정부 조직이나 공무원 인재 양성 시스템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대선이 다가온다. 차기 정부는 어떤 통상 전략을 세워야 할까.

“과거의 세계 통상 질서는 교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 통상은 패권을 다투는 중요한 수단이 됐다. 기술과 산업, 안보와 연계돼 있고, 사회적 이슈까지 얽혀 국가 전략의 핵심 축이다. 단순히 주어진 규칙을 안정적으로 따르고, 무슨 일이 생기면 분쟁 절차에 들어가겠다는 자세에 머무르면 국익을 극대화할 수 없다. 이른바 ‘룰메이커(rule maker)’로 직접 새 국제 질서를 만드는 데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에게 최대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만드는 시절이라고 생각하고 참여해야 한다. 세계의 흐름을 미리 읽고 움직여야 한다.”

2019년 11월, 태국 방콕에서 열린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아시아·태평양 지역 16국 간 자유무역협정)회의에서 유명희 본부장(맨 오른쪽 아래)이 태국·싱가포르 통상장관 등과 대화하는 모습. /산업통상자원부

◇ “유명희는 대한민국 통상의 역사”

유 전 본부장의 남편은 2016~2020년 국민의힘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정태옥 경북대 교수다. 남편이 현 정부와 반대 진영에 몸담고 있었던 터라 더는 승진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도 나왔다. 하지만 정부는 2019년 2월 그를 차관급인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임명했다. 전임자인 김현종(전 국가안보실 2차장) 본부장은 “국익을 위한 인선”이라며 그를 강하게 천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편 때문에 손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처음에는 ‘마누라 괴롭히려면 정치하라’고 했다. 가족이 힘드니까. 그런데 뭘 하더라도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고, 자기 일 알아서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내가 정무직으로 가기에 손해 본다는 생각은 안 했다. 남편이 대구에서 두 번 선거했는데, 2016년에는 주말에 가서 도왔다. 선거관리위원회 규칙에 공무원이라도 배우자가 출마하면 도울 수 있다고 돼 있더라. 작년 선거 때는 내가 정무직 공무원이어서 일절 대구엔 가지 않았다.”

-사표를 썼는데, 승진했다.

“2018년 말에 사표를 냈다. 남편이 현역 야당 국회의원이어서 정무직으로 승진할 기회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사표 내는 시점을 한미 FTA 재협상 국회 비준이 끝날 때로 잡았다. 어쨌든 내가 수석 대표로 협상을 타결시켰으니까 책임감이 있었다. 그런데 한두 달이 지나도 사표가 수리되지 않아 의아하다 생각했다.”

-김현종 본부장이 “유명희는 대한민국 통상의 역사”라고 했다. 왜 높게 평가할까.

“서로 일하는 스타일이 맞는다. 둘 다 미국 등 외국의 정치·경제·선거 등 온갖 자료를 정말 많이 읽고 공부하고, 그걸 바탕으로 얘기한다. 새벽 한두 시에도 전화로 깨워서 얘기하고, 아침에도 다시 토론했다. 한미 FTA 처음 시작할 때부터 계속 그랬다. 둘 다 업무에 꽂히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투입하는 스타일인데 그런 게 잘 맞았던 것 같다.”

-영어로 대화하는 경우도 많을까.

“물론 한국어로 주로 대화하지만, 영어를 섞는 경우도 많다. 상황에 따라 영어가 더 정확한 순간을 표현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교섭할 때 우리가 전략 차원에서 상대에게 일부러 과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상대방이 이를 덥석 수용하면서 우리가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역제안을 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우리가 더 곤란해진다. 그럴 때 ‘괜히 오버 말고 조심해. 오히려 더 불리해져’란 의미로 ‘Be careful what you wish for’라는 표현을 쓴다. 이런 표현은 영어로 하는 게 의미 전달이 더 잘된다.”

◇ “통상 이해하려고 매일 신문 11가지 읽었다”

아들과 딸 남매를 둔 그에게는 ‘유리 천장 깨기 전문가’라는 수식이 따라붙는다. 산업부 70년 역사상 여성으로는 처음 차관직에 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대기업 임원이셨다는데.

“친정 아버지가 현대중공업에서 플랜트 수출 업무를 담당하셨다. 주로 중동 국가에서 일하셨는데, 한번씩 나가면 몇 년 있다가 들어오셨다. 나와 오빠, 동생들은 외국에 나가면 공부를 못 한다는 이유로 한국에 있었다. 부족하지 않게는 살았지만, 금수저는 아니었다.”

-해외 출장 많은 직업인데 아이들은 어떻게 돌봤나.

“평생에 걸친 숙제였다. 큰아이는 시어머니가 봐주셨고, 둘째는 가사 도우미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지만 엄마가 대화하고 봐줘야 하는 영역이 있다. 출장 나가도 아이들과 계속 대화하려고 했다. 한번은 한미 FTA 협상 중에 미국 대표가 치열하게 받아치고 있는데, 중학생이던 딸이 문자를 보내왔다. ‘너무 우울하고 속상하다. 엄마와 통화하고 싶다’고. 도저히 통화할 수 없는 상황이라 ‘지금 협상 중이라서 안 된다’고 했는데, ‘나는 그래서 엄마가 싫다고, 나도 집에 있는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미국 대표단 앞에서 치열하게 반박해야 한다고 다짐했는데, 딸아이 문자를 받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남편은 별 도움 안 되더라. 쉬는 시간에 남들은 커피 마시며 휴식하는데 나는 애한테 전화해서 달래야 했다. 외국에 있으면 새벽 두세 시에도 아이들 전화는 꼭 받았다.”

-시어른들은 똑똑한 며느리를 좋아하셨나.

“나는 울산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부터 서울에서 컸다. 아버지는 외국을 많이 다니셔서 그런가 집안일도 많이 하셨다. 시댁은 경북 포항인데 엄청 보수적이었다. 명절에 설거지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여자들은 일하는데 남자들은 거의 놀았다. 거의 50년대 풍경이랄까(웃음). 하지만 남편이 나를 많이 밀어줬다. WTO 사무총장 출마할 때도 딸은 고3에, 남편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상황이라 주저했는데 남편이 더 화를 내면서 반드시 나가라고 하더라.”

-어릴 적 해외에서 살지도 않았는데, 영어는 어떻게 익혔나.

“내 나라 말이 아니다 보니 영어로 얘기하면 에너지를 더 쓰게 되고, 훨씬 피곤하다. 온종일 시나리오 없이 즉석에서 대응하고 반박해야 할 때 언어가 따라오는 속도가 느려지면 문제가 생긴다. 아이들은 내가 중국, 싱가포르 등에서 외교관으로 일할 때 함께 살아서 영어에 익숙하다. 그래서 해외 출장이 잡히면 1주일 전쯤부터 아이들과 영어로 대화한다. 미리 감을 익히기 위해서(웃음). 내가 영어 쓰자고 하면, 아이들은 ‘엄마 또 출장 가?’라고 물어본다. 영어에 왕도는 없는 것 같다. 공직에서 떠난 지금도 매일 영어 공부를 한다. 특히 영어로 된 외국 신문 5가지를 읽는다. 사설과 칼럼은 반드시 읽는다.”

-후배 여성 공무원들에게 해줄 말이 많을 것 같다.

“일단은 실력을 갖춰야 한다. 통상은 공부하고 준비한 만큼 실력이 쌓이고 성과가 드러난다. 외국과 통상 교섭을 하면 수석 대표가 발언하는데, 여러 부처 관계자 20~30명 정도가 뒤에 앉는다. 그 사람들이 잘하는지 못하는지 금방 평가할 수 있다. 상대방과 주거니 받거니 하면 주도적으로 잘 받아치는지, 아니면 딸리는지 그대로 드러난다. 공부한 만큼 평가를 받는다. 또 하나, 신문을 많이 읽어야 한다. 특히 최근 통상 문제는 산업·기술·안보·사회적 이슈까지 모두 융합돼 나타난다. 다방면에 지식이 있어야 대처할 수 있다. 나는 외국 신문 5가지와 우리나라 신문 6가지를 본다. 굉장히 오랜 기간 축적한 습관이다. 조직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 회의를 위해 늦게까지 남고, 주말에도 무조건 나오라고 해선 안 된다. 인풋(투입)에 비해 아웃풋(결과)이 더 많도록 하는 여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WTO 사무총장 선거에 또 나갈 생각이 있나.

“모든 것엔 타이밍이 있다. 우리 세대가 한국의 역량을 보여줬다면, 후배 세대는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만들어가는 데 큰 역할 했으면 좋겠다.”

-평생 앞만 보며 달리다가 지난 한 달을 백수로 살았다.

“아직은 재충전이 필요하다. 책을 원 없이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앞으로 뭐 할지는 정하지 않았는데, 정치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하하!”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