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묵은 듯한 이 와인, 그 배반의 쓴맛이 좋았다

한은형 소설가 입력 2021. 9. 18. 03:01 수정 2021. 9. 18.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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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오렌지 와인이라고 아시는지. 처음에는 ‘오렌지로 만든 와인인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술의 세계란 무궁무진하고, 새로운 술이 계속 나오며, 내가 마셔보지 못한 술이 너무 많아 다 관심을 둘 수가 없다. 그런데 자꾸 보였다. 오렌지 와인이라는 글자가 말이다. 내가 어딜 자주 다니고 그러는 사람이 아닌데도 그래서 ‘오렌지 와인이 대세인가?’ 싶었다.

그러다 마셔보았다. 그간의 궁금증도 해결할 겸 해서 말이다. 용산 삼각지역 부근의 와인 바에서였다. 요즘 그 동네를 가면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가게가 생겨나고 있는데, 주로 와인바이거나 주인의 개성이 느껴지는 술집일 때가 많아서 고개를 빼고 보게 된다. 다음에 갈 집을 미리 물색해두는 거다. 그만큼 궁금한 데가 꽤 있다.

오렌지 와인은 화이트 와인용 포도를 껍질째 발효해 오렌지빛을 띠는 와인이다. /pixabay

그 집도 그렇게 가게 되었다. 갤러리처럼 와인을 ‘걸어’ 둔 집이었다. 주류 회사가 운영하는 대형 와인숍과 달리 와인을 쟁여둘 자본이 없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와인보다 벽의 여백이 더 느껴지던 그 공간에서 와인은 작품처럼 보였다. 그래서 더 와인이, 와인의 라벨이 잘 보였다. 라벨은 내게 매우 중요한데, 와인에 대해 잘 모르므로 라벨에 의지할 수밖에 없어서 그렇다. 피노 누아(Pinot Noir)나 쇼비뇽 블랑(Sauvignon Blanc), 샤르도네(Chardonnay) 같은 내가 좋아하는 포도의 종인지도 고려의 대상이지만 라벨의 폰트나 색감, 그림 같은 것으로 마음이 기운다. 물론, 극도로 제한된 예산 안에서이지만 말이다.

술의 라벨에서 술의 정서를 느낀다. 일단 느껴야 다음으로 건너갈 수 있다. 소설에서라면 어조가 될 것이고, 노래에서는 목소리일 것이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는 가수의 곡이라고 해도 끌리지 않는 목소리라면 듣고 있게 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면 적절한 비유일까. 나는 ‘오렌지’라는 단어에서도 어떤 정서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마시게 되었고, 이렇게 쓰고 있다.

굳이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삼각지의 와인바에도 정서가 있었다. 그 와인바의 고유한 정서에 기여하고 있는 요소 중 하나인 와인바 사장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왜 오렌지 와인이에요?”라고. 사장님이 명료하게 답해주셨다. “오렌지색이니까요.” 그리고 또 이렇게. “화이트 와인용 포도 껍질과 씨를 같이 넣으면 이렇게 오렌지빛이 돼요”라고. 나는 그제야 화이트 와인이 포도의 즙만으로 만드는 술이었지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레드 와인은 포도의 즙과 껍질을 모두 넣어 만드는 술이라는 데에도.

오렌지 와인은 말 그대로 오렌지빛이다. 필스너의 황금색 못지않게 오렌지 와인의 오렌지색은 감상할 만했다. 레드나 화이트, 그리고 로제 와인은 이렇게 오래 바라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물론 레드 와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색은 아니다. 같은 레드지만 피노누아는 맑은 레드고, 말벡(Malbec)은 검은 기가 도는 어두운 레드다. 또 이런저런 화이트 와인을 마시면서 어떤 화이트는 녹색에 가깝고, 어떤 화이트는 노란색에 가까우며, 또 어떤 화이트는 거의 투명한데 다 화이트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색을 보고, 냄새를 느끼고, 맛을 보는 게 와인을 마시는 법이라는데 그날의 나는 냄새를 미처 느낄 새도 없이 마셨다. 오렌지색에서 어떤 맛이 나는지 알게 되는 발견의 순간이었기 때문에. 달콤함은 전혀 없었다. ‘오렌지’라는 단어의 느낌을 배반하는 맛이랄까? 오렌지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무래도 자동연상이 되지 않나. 오렌지 과육이 뿜어져 나오는 환시와 함께 달콤함이 분출되고… 이를 데 없이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남국적인 온기가 말이다. 오렌지 와인에 그런 건 없었다. 그렇지. ‘오렌지 와인’이지 ‘오렌지’는 아니지. 대신 드라이하고, 산뜻하고, 쓰다. 그리고 신선했다. 드라이하고 산뜻한 것은 내가 화이트 와인을 좋아하는 이유이니 당연히 좋았고, 쓴맛! 무엇보다 이 쓴맛에 눈이 떠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렌지는 달콤할 뿐만 아니라 씁쓸하고, 나는 그래서 오렌지를 좋아한다는 것을.

오렌지의 쓴맛을 좋아한다. 그래서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좋아하고, 더 쓴맛이 나는 오렌지 마멀레이드를 찾기 위해 구할 수 있는 오렌지 마멀레이드는 다 먹어보려고 한다. 샤인머스캣처럼 달콤하기만 한 것은 별로 매력이 없다. 입체적이지 않아서다. 2D 느낌이랄까.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술에서 나는 쓴맛까지 좋아하게 되었다. 달콤씁쓸함의 대명사인 칵테일, 네그로니(Negroni)에 길들여져서 그런지 쓴맛으로 인해 맛이 가파르게 격상되었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화이트 와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쓴맛에 눈 떴다. 그리고 그리워하게 되었다.

오렌지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후 알게 되었다. 내가 느낀 ‘쓴맛’은 껍질과 씨를 같이 넣고 술을 만드는 오렌지 와인의 제법에서 온 것임을 말이다. 껍질과 씨와 포도 과육을 함께 넣고 만드는 레드 와인의 제법과 같으면서 다른 것은 오렌지 와인은 껍질과 씨를 레드 와인보다 훨씬 일찍 제거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화이트 와인과 오렌지 와인은 청포도로, 레드 와인은 포도로 만든다는 것도 다르고.

흥미로운 것은, 내가 오렌지 와인에서 좋아하는 요소인 이 쓴맛은 타닌 때문이라는 점이다. 타닌은 껍질과 씨로부터 생성되는 물질이다. 레드 와인에서 느껴지는 떫은맛과 텁텁한 맛, 바로 그게 타닌이다. 껍질과 씨를 넣지 않는 화이트 와인에는 타닌이 거의 없다. 나는 이 맛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레드보다 화이트 파(派)였던 것인데, 타닌 때문에, 타닌의 쓴맛 때문에 오렌지 와인에 반응한다는 게 웃기다. 웃기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심오하기도 한데,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음이란 이렇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들과 함께 놓여 있느냐에 따라서 말이다. 오렌지 와인을 마시면서 이렇게 세상의 이치(?)에 대해 깨닫기도 한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오렌지 와인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진 새로운 와인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존재했던 술이다. 포도의 전체로 술을 담는 레드 와인과 달리 포도즙으로만 담는 화이트 와인이 더 만들기 어렵다고 하는데, 고대에는 화이트 와인도 레드 와인과 같은 방법으로 담았다고. 오렌지 와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의 이 말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와인에는 화이트, 옐로우, 레드, 블랙, 이렇게 네 가지 색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레드는 로제 와인, 블랙은 레드 와인인 것 같고, 옐로우가 바로 오렌지 와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이때의 화이트 와인은 어떤 와인일까 하는 궁금증이 남는데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세상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오렌지 와인 만드는 법이 어느 날 다시 부활했다. 그 덕에 매일 오렌지 와인 한두 잔을 마시며 생각한다. 이건 고대인이 마시던 노란 와인이기도 하다고 말이다. 몇천 년간 땅속에 묻혀 있다가 출토된 항아리에 담긴 액체를 마시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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