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마지막 생일파티 아니길".. 병원-집 오가며 '재활사투'
2019년 3월. 임서영 씨(34·여)는 아들 지오 군(3)이 멘케스병 의심 진단을 받은 그날을 잊지 못한다. 병명만 듣고선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소식을 듣고 직장에서 먼저 멘케스병을 검색해 본 남편 김효곤 씨(40)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3세 이전 사망.’ 여섯 글자만 눈에 들어왔다. 인터넷을 더 뒤져봐도 생존율이나 치료법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 기적은 없지만 포기도 없다
지오는 백일이 지났는데도 좀처럼 목을 가누지 못했다. 처음엔 그저 발달이 조금 느린 줄만 알았다. 감기 때문에 간 동네 소아과에서 큰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워낙 드문 병이라 대학병원에서도 정확한 진단을 못 내렸다.
“유전자 검사를 해 봐야겠지만 멘케스가 맞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간 병원에서 마침 이 병에 관한 박사논문을 쓴 전문의를 만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몇 주 동안 지오를 유심히 관찰했다. 멘케스병이 아니라는 근거를 찾고 싶었다.
“멘케스병 아이들은 경련도 잦고, 음식 섭취도 잘 못한다고 하는데 지오는 달랐어요. 주위에서도 ‘늦되는 아이들이 있다. 걱정 마라’고 했죠.”(임 씨)
확진 후에는 ‘경증 멘케스는 아닐까’ 기대도 했다. 찾아보니 해외에는 지적 장애가 있어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환자도 더러 있었다. 걷고 말도 했다. 그래서 재활도 더 열심히 했다. 병원에선 뼈가 잘 부러질 수 있으니 운동을 조심하라고 했지만 아랑곳 않고 일주일에 5번씩 재활을 다녔다. 기특하게도 지오는 힘든 과정을 잘 버텨줬다. 멘케스 가족들은 다른 난치병 환자들처럼 완치의 기적을 꿈꾸지 않는다. 임 씨는 “처음에는 ‘왜 아직도 못 고치는 병이 있나’ 원망도 많이 했다. 몇 년을 사느냐의 차이일 뿐 결론이 정해져 있다는 게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고 했다.
○“어린이집에서 보내 온 사진에 울컥”
멘케스병의 3분의 2는 모계 유전으로, 나머지는 가족력 없이도 발병한다. 지오는 후자다. 임 씨는 보인자가 아니지만 지난해 둘째를 가졌을 때 부부는 덜컥 겁이 났다. 아들이라 또 돌연변이가 생길 확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정확한 검사가 가능한 14주차까지 두 달 넘게 마음을 졸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태명도 짓지 않았다.
생후 6개월인 도아는 다행히 또래보다 크고 건강하게 자랐다. 들쭉날쭉하던 지오의 컨디션도 올 들어 눈에 띄게 안정됐다. 올 초 음식물을 넣어주는 위루관과 오줌을 빼는 도뇨 장치를 단 뒤부턴 부기가 빠지고 체중은 부쩍 늘었다. 최근엔 네 식구가 처음으로 2박 3일 강원 속초 여행을 다녀왔다. 지오의 첫 여행, 첫 바다였다.
둘째 덕에 입소 대기 순위가 높아져 장애 전문 어린이집에도 다닐 수 있게 됐다. 남들 다 다니는 어린이집이지만 부부에겐 더없이 특별하다. 임 씨는 “병원과 집 외에도 지오가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하다”며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신기하고 울컥한다”고 했다.
○부모의 ‘마음 건강’도 중요
“예전처럼 마음껏 못 안아주는 게 가장 미안해요.”
14일 경기 화성시 자택에서 만난 ‘멘케스 맘’ 정현주(가명·46) 씨는 누워 있는 아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박정인(가명·10) 군은 다음 달 열 번째 생일을 맞는다. 국내 멘케스 환자 중 가장 나이가 많다. 부모는 매년 이번이 마지막 생일이 아니길 기도한다. 정 씨는 “2년 전까지는 병원에서 그만 내려놓으라고 할 정도로 들어서 안고 있었는데, 이젠 혼자 일으키기도 힘들다”며 안타까워했다.
보통 아이들은 클수록 활동 반경이 넓어지지만 멘케스병은 반대다. 침대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다. 근육의 수축하는 힘(근긴장)이 떨어져 거동이 부자연스럽다. 정인이도 고관절이 빠져 있는 상태다.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출혈이 많고 위험을 감수해야 해 엄두가 안 난다.
10년째 거동이 힘든 아이를 돌보면서도 정 씨는 “별로 힘들었던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5년 전 기관절개 수술을 받은 뒤 정인이 상태가 안정된 것도 있지만 정 씨 스스로가 마음의 여유를 찾은 게 컸다. 3년째 활동보조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정인이에게 쓸 에너지를 아끼는 법을 배웠다. 올 4월부턴 정인이가 다니는 병원의 소아완화의료팀 상담도 시작했다. 정 씨는 “아픈 아이를 돌보려면 부모의 마음 건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린이집, 재활센터는 항상 ‘대기 중’
멘케스병은 아직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 일찍 발견했을 경우 구리를 투약하기도 하지만 병의 진행을 막기보다는 생명을 조금 더 연장시키는 정도다. 그마저도 유전적 결함이 심하거나 병세가 진행된 후에는 효과가 거의 없다. 이범희 서울아산병원 의학유전학센터 교수는 “늦어도 생후 한 달 이내, 더 빨리는 태아 단계에서 치료를 시작해야 구리 주사의 효과가 있다지만 멘케스병의 특성상 조기 발견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아이가 커 갈수록 부모의 어깨는 무거워진다. 가래 흡입 장치를 달고 있는, 20kg이 넘는 아이를 엄마 혼자 옮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장애인 택시를 부르면 2시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집에 가는 길에 산소가 부족할까 봐 병원 복도에서 산소공급 장치를 충전하며 기다리는 일도 허다하다.
멘케스병 부모들에겐 아이가 집과 병원 외엔 갈 곳이 없다는 게 가장 서글프다. 지오가 다니는 어린이집은 경기 하남시에서 유일한 장애 전문 어린이집이다. 서울 8곳, 경기 21곳 등 전국에 176개소(2019년 기준)가 있다. 장애 통합 어린이집(1100개소)도 있지만 장애 아동의 몫은 정원의 20% 이내다. 중증 장애를 다룰 인력도 부족해 주로 경증 장애 아동들이 이용한다.
재활시설은 ‘재활 난민’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부족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올 1월 기준 국내 장애 아동 29만 명 중 재활치료를 받는 아동은 6.7%에 불과하다. 지오도 여러 재활기관에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씩 대기를 걸어 두고 순서가 돌아오면 치료를 받고 있다. 김 씨는 “재활을 다니면 몸에 버티는 힘이 생기고 눈빛도 또렷해지는 게 보인다”며 재활 기회가 더 늘어나길 희망했다. 멘케스병 아이를 키우며 가족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가족이 함께 외식하고 산책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 아주 감사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정 씨)
“둘째 도아도 형을 기억하겠죠.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친구에 대한 편견 없이 자라줬으면 좋겠어요.”(임 씨)
하남·화성=박성민 기자 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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