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고 낯선데 오감이 깨어난다, 먹는 도구의 '반란'
━
[쓰면서도 몰랐던 명품 이야기] 스티뮤리 디자인 식기
새로 생긴 여의도의 한 백화점에 갔다. 하늘이 보이는 높은 천장에선 빛이 비쳤다. 매장보다 빈 공간의 여유가 먼저 다가오는 내부는 답답한 기존의 백화점과 달랐다. 터진 시야 뒤에 무엇이 나타날지 궁금해진다. 곧 공중에 떠 있는 커다란 나무와 마주치게 된다. 곁에는 휜 벽을 타고 내리는 폭포의 물줄기 소리가 요란하다. 올림픽경기장처럼 가운데가 비어있고 주변을 매장으로 채운 공간 배치가 신선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달라지는 시선의 끝점엔 흥미로운 볼거리가 넘친다. 입고 싶고 갖고 싶은 브랜드 로고가 눈에 뜨이지 않을 수 없다. 카페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면 곧바로 내려가 커피가 마시고 싶고, 구수한 빵 냄새를 맡으면 먹고 싶어진다. 강렬한 색깔의 조각품을 보니 갑자기 레게 음악의 리듬이 떠오른다. 음악의 기억이 사라지기도 전 LP 플레이어가 돌아가는 게 보인다.
공감각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봤다. ‘감관영역의 자극으로 하나의 감각이 다른 영역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현상.’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다른 설명은 이렇다. ‘눈으로 보는데 소리가 들리고 냄새 맡으니 색을 느끼는 상태.’ 조금 구체적이다. 하지만 내 경우를 대입해보면 여전히 공감되지 않는다.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이런 공감각을 느끼는 건 아니다. 직관력이 뛰어나고 예지력을 갖춘 사람들 일부가 공감각자라는 게 정설이다.
그럼 보통 사람은 공감각을 느끼지 못할까? 그렇지 않다. 특정 자극에서 전혀 다른 감각으로 번지는 연상 효과가 중요하다.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는 오감이 무작위적으로 연결되거나 증폭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백화점의 예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오감이 동원되어야 하는 게 먹는 일이다.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 세팅과 사용되는 그릇과 도구, 방의 분위기까지 모두 제 역할을 한다. 눈이 즐거우면 맛도 좋게 느껴진다. 음식을 뜨는 숟가락의 형태와 질감도 기분에 영향을 미친다. 젓가락으로 집은 떡의 물컹한 감촉까지 손으로 전달된다면 부드러운 맛이 배가되는 경우를 경험했을 것이다. 음식과 입이 이어지는 모든 과정을 감각의 잣대로 보면 중요하지 않은 게 없다. 각각의 감각은 개별로 혹은 연결되고 섞여서 몸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먹는 일의 쾌감은 포만감에서만 생기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자. 유럽에서도 백여 년 전에서야 비로소 식기가 디자인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음식만큼 중요한 먹는 도구를 비로소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파악하기 시작한 거다. 독일의 장식미술관엔 바우하우스 시대의 포크와 나이프 접시와 주전자들이 진열돼 있다. 재질을 바꾸고 형태의 조형적 아름다움이 입혀진 흔적들이다. 먹는 일이 감각적으로 다가오게 한 여러 시도가 눈에 띈다. 이후의 디자인은 형태를 가다듬는 연장선에 있다. 숟가락과 포크, 나이프는 여전히 음식을 먹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음식과 입을 연결하는 게 숟가락·젓가락·포크·컵·그릇이다. 먹는 일을 감각하는 것으로 바꾸는 좋은 매개체가 된다. 금속 대신 세라믹과 목재로 손가락 닿는 부분의 감촉을 바꿔 신선함을 더했다. 돌기와 뿔을 달아 아픔마저 맛의 강렬함과 연결시켰다. 익숙한 손잡이의 재질 교체로 이질적 감촉의 낯섦을 경험케 했다. 강렬한 색채를 입혀 시각적 연상을 소리로 치환시키기도 한다. 남자가 보면 여자의 그것 같고 여자가 보면 남자의 그것 같은 형태로 성적 충동을 유도시키는 건 보통이다.
공감각은 익숙한 관습과 낡은 반복을 뒤집어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당연하다 생각됐던 부분이 특별한 경험으로 바뀌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불편하게 만들어 먹는 시간을 늘리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러면 왜 안 되지?’를 사용자에게 거꾸로 묻고 있다. 익숙한 관행의 역전에서 오는 쾌감을 제안하는 중이다. 먹는 동안 끊임없이 다른 감각으로 번지는 자극을 흘려버리지 말 일이다. 도구의 역할을 조금 바꾸었을 뿐인데 먹는 일이 색다르게 다가오고 즐거워지는 건 바로 공감각의 발동 때문이라는 거다.
나는 스티뮤리의 숟가락과 컵을 몇 년째 사용하고 있다. 이들 제품은 하나같이 이상하게 생겼다. 움푹한 숟가락 면에 굴곡진 주름이 있거나 뭉툭한 돌기가 솟아있다. 숟가락을 입 안에 넣고 빼는 동안 덜그럭거리고 압박감이 생긴다. 쓰지 않던 감각의 자극은 내 몸에 이런 부분이 있던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평소 보던 좌우대칭의 일자로 된 숟가락 대 대신 체감률이 큰 대롱 모양으로 끝이 푹 패인 것도 있다. 쥐는 순간 야릇한 느낌이 든다. 뭉툭하고 두꺼운 숟가락은 입천장에 뭉툭한 부분이 먼저 닿아 자극을 준다. 맛의 감별에 역할을 하지 않는 듯한 입천장이 새삼 맛을 느끼는 기관이 된 기분이다. 어떤 숟가락은 둥근 빨대 사탕처럼 생겼다. 끈적한 액체를 묻혀 한입 가득 빨아먹어 보라는 거다.
하나같이 평소 느껴보지 못한 낯선 자극은 신선하게 다가온다. 만지고 입속에 넣는 일련의 행위가 묘한 쾌감으로 반전되는 걸 느낀다. 숟가락을 바꾸었을 뿐인데 음식을 맛보고 느끼는 방법과 효과가 달라진다는 게 놀랍다. 이들 숟가락은 선뜻 쓰게 되지 않는다. 선입견과 관행 탓이다. 그런데 한번 써 보면 생각이 바뀐다. 다른 자극이 궁금해진다. 하나둘 모으게 된 공감각 숟가락의 숫자가 어느새 많아진 걸 보고 나도 놀랐다.
윤광준 사진가. 충실한 일상이 주먹 쥔 다짐보다 중요하다는 걸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수술대 위에서 깨달았다. 이후 음악, 미술, 건축과 디자인에 빠져들어 세상의 좋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됐다. 살면서 쓰게 되는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일 또한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심미안 수업』 등을 썼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