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로 간 흥보·놀보, 창극 실험의 '화룡점정' 찍다

유주현 2021. 9. 18.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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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국립창극단 ‘흥보전(展)’
국립창극단 신작 ‘흥보전’은 설치미술가 최정화가 시노그래퍼로 참여해 화려한 미디어아트 열전을 선보인다. [사진 국립극장]
9월,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이 정식 재개관을 선포했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을 비롯한 전속 단체들이 저마다 재개관 기념작을 내놓는 가운데, 국립창극단이 선보이는 무대는 ‘흥보전(展)’(15~21일)이다. 사실 좀 갸우뚱했다. 가뜩이나 권선징악, 인과응보 같은 유교적 세계관이 요즘 세상에 걸맞지 않아 보이는데, 심지어 한국 공연계 전설적 인물인 제 21대 국립극장장 허규의 1998년작 ‘흥보가’를 원작 삼고, 김명곤 연출에 안숙선 명창이라는 ‘살아있는 전설’들로 창작진을 꾸렸다니. 과연 새 극장에 걸맞는 새로운 무대가 될지 의심스러웠다.

2010년대 국립극장은 거대한 공연예술 실험의 장이었다. 1950년 창설 이래 전통 소재로 스펙터클한 대극장 공연을 만들어 왔지만, 21세기 들어 동시대 관객의 외면을 받게 된 찰나였다. 2012년 안호상 전 극장장이 레퍼토리 시즌제를 전격 도입하면서 실험실로 거듭났다. 시즌을 가득 채울 신작을 쏟아내 새로운 관객을 맞아야 하는 전속 단체들은 핫하다는 외부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해 전통을 소재로 마음껏 실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줬다.

특히 판소리라는 태생적으로 토속적인 예술을 하는 창극단이 급진적인 실험으로 이슈몰이를 했다. 국악인이자 연극계 국민배우인 김성녀 전 예술감독이 종횡무진했다. 해외 오페라 거장들이 창극단에서 판소리 5바탕을 자기식으로 재해석했고, 재기 넘치는 연극 연출가들은 그리스 비극에 소리를 입혔다. 중국 경극에 소리를 태우기도 하고, ‘변강쇠가’ 같은 소실된 판소리를 복원하기도 했다. 그 결과 ‘트로이의 여인들’ ‘패왕별희’ ‘변강쇠 점찍고 옹녀’ 등 인기 레퍼토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흥보씨’(2017)도 그중 하나였다. 연극계 젊은 거장 고선웅 연출이 ‘출생의 비밀’ 코드와 B급 언어유희를 덧입혀 착한 동화를 풍자와 해학 넘치는 삼류 치정극으로 반전시키며 버라이어티한 볼거리를 만들었다. 전방위 뮤지션 이자람의 작창과 음악도 판소리 원형을 존중한 현대적인 사운드로 ‘확 젊어진’ 흥보가를 선보여 호평받았었다.

국립창극단 신작 ‘흥보전’은 설치미술가 최정화가 시노그래퍼로 참여해 화려한 미디어아트 열전을 선보인다. [사진 국립극장]
그런 ‘젊은 흥보씨’를 뒤로 하고 ‘전설’들이 새로 만든 ‘흥보전’이라-. 왠지 급노화한 흥보씨를 만날 것 같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김명곤 연출과 최정화 시노그래퍼는 흥보가 한국판 판타지의 주인공이란 점을 부각해 ‘메타버스’로 보내 버렸다. 흥보와 놀보는 대도구 하나 없이 두 개의 거대한 LED 패널에 비친 가상현실 속 조선시대를 살고 있다. 흔한 영상디자인과 차원이 다른 고퀄리티 미디어아트가 창극 ‘흥보전(傳)’의 배경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흥보전(展)’이라는 미디어아트 전시에 소리꾼들이 행위예술가로 참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첨단 미디어아트 기술 발달로 공연과 전시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최신 트렌드의 현장이랄까.

‘흥보전(傳)’이 아니라 ‘흥보전(展)’이라는 제목처럼, 세계적인 설치미술가인 최정화 시노그래퍼의 존재가 지배하는 무대다. ‘시노그래퍼’란 타이틀이 생소하지만, 무대디자인과 영상디자인과 의상 등 모든 비주얼 요소를 책임지는 수퍼바이저 역할을 한 게 그다. ‘세기의 선물’ 등 그의 압도적인 설치미술이 투영되며 장면 전환마다 심오한 작품인 듯한 미디어아트 열전을 구경하느라 지루할 틈이 없다. 제비나라 설정을 강화했을 뿐 스토리라인은 고전 그대로임에도 그렇다. 국립무용단이 ‘묵향’ ‘향연’ 등에서 디자이너 정구호를 기용해 전통 춤사위 그대로 세련된 한국미를 제시한 것이 떠올랐다. 창극이 현대미술을 만났을 뿐인데 뻔한 이야기에까지 집중이 됐다. 최정화를 ‘창극단의 정구호’라 부르고 싶은 이유다.

사실 그는 박찬욱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을 비롯해, 현대무용가 안은미의 무대, 2018 동계 패럴림픽 개폐막식, 이날치와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수궁가’ 등 이미 온갖 힙한 예술현장의 비주얼을 책임져 온 실력자다. 그런데 설치미술가가 왜 굳이 미디어아트를 활용했을까.

‘흥보전(展)’이 신기루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라서다. 개막 전 만난 그는 놀보 집을 장식하는 자신의 대표작 ‘세기의 선물’이 예식장 기둥을 패러디한 것인데 불가리(BVLGARI) 보석전에도 전시돼 있다면서 “진짜 로마 기둥이 아니라 가짜 서양조각을 흉내 내 조롱하는 작품이 유럽 최고 명품과 같이 전시되다니 얼마나 아이러니하냐”며 허울만 좇는 ‘놀보들’의 욕망을 비웃었었다. 김명곤 연출도 “착한 흥보, 나쁜 놀보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헛된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남태평양 훨훨 날아 보르네오 섬을 지나/ 자카르타, 수마트라, 경치가 수려하다/ 하늘 끝 맞닿은 필리핀을 바라보다’로 이어지는 눈대목 ‘제비노정기’처럼, 김 연출과 안숙선 명창이 어려운 한자어를 일체 배제하고 현대어로 각색한 노랫말도 듣기 편했다. 북 장단 중심이지만 창극단 기악부 전원이 참여하고 첼로와 바이올린, 콘트라베이스까지 들어와 대중적인 오케스트레이션으로 대극장 뮤지컬 분위기까지 살린 박승원의 음악도 완성도가 높았다.

착한 이야기는 그대로였다. 김 연출은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넘어 인간이 가진 욕망의 파노라마를 펼쳐보이겠다”고 했지만, 욕심 좀 덜 부리고 나누며 퍼주며 살자는 메시지가 흥보가 최고의 미덕임은 불변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비틀기나 재해석은 돋보이지 않았지만, ‘흥보전(展)’은 보수적이면서도 발전적인 무대였다. 사실 그간의 실험작들은 전통의 소리와 현대적인 해석이 부딪히면서 불가피하게 소리와 극, 무대가 묘하게 겉도는 지점이 생기곤 했었다. 그런 위화감과 긴장감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흥보전(展)’은 드디어 실험의 완성 단계에 도달한 것 아닐까.

엔딩의 전 단원 대합창도 마당놀이처럼 꽹과리 반주와 태평소 가락에 맞춘 길놀이가 적당히 흥에 겨웠다. 단원들의 덩실덩실 춤사위도 나름 군무 대열로 각을 잡아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다. 전통도 실험도 대중화도 ‘투머치’하지 않은 세련된 모던 창극이 2020년대를 여는 해오름극장 재개관에 즈음해 완성된 것 같아 보기 좋았다. 지난했던 창극 실험의 화룡점정은 ‘살아있는 전설’들의 몫이었다.

유주현 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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