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10] "먹고살자" 석탄 구뎅이 들어갔다…1330m 만항재 밑 검은 물이 흘렀다

김홍준 2021. 9. 18.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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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만 버티자며, 20대 남자는 강원도 사북으로 향했다. 탄광산업 호황으로 개도 만 원권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시절, 1971년이었다. 한 탄좌(炭座·석탄 광구의 집합체)를 찾아갔더니, 50㎏짜리 포대를 들라고 하더란다. 가족 생계가 달린 몸, 으라차차 수차례 들어 올렸다. 합격. 회사에서는 이튿날부터 일하러 나오라고 했다. 김기식(79·사북읍)씨의 회상이다.

한반도 남쪽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강원도 태백시와 정선군 사이의 함백산(1573m) 정상. 최은규(39·경기도 고양시)씨 가족이 만항재(1330m) 고갯마루로 향하는 414번 지방도로 너머 백운산(1426m), 장산(1409m), 매봉산(1271m), 질운산(1173m) 등 능선의 파도를 바라보고 있다. 김홍준 기자
삼탄아트마인 복도에 전시된 삼척탄좌 정암 광업소의 탄광 노동자 사진. 김홍준 기자
“몸만 건강하면 뭐라도 안 되었겠소. 아내와 코흘리개 아이 데리고, 이불·식기만 챙겨 갔지요. 쌀·연탄이 나오더라고. 나중에는 탄좌 사택에 머물며 밤이슬은 피했고요.”

지금은 석유와 함께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히지만, 석탄은 대한민국 산업화의 땔감이요 일자리 창출의 공신이었다. ‘검은 황금’ 석탄은 사람을 모았고 길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어느 고개 밑에 마을을 만들고 학교를 세웠으며, 고갯길은 번듯한 도로가 됐다. 그 고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자동차도로가 지나는 만항재(1330m)다. 갈 수 있는 길은 두 갈래. 산중도로였던 운탄고도를 따르거나, 지방도로 제414호선을 이용하면 된다.

# 사북·고한 인구 급증하며 '읍' 승격
지난달 31일 김기식씨를 만난 곳은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백운산 도롱이연못. 해발 1100m ‘운탄고도(運炭高道)’의 한 지점이다. 운탄고도는 예전 만항재에서 함백역까지 이어지는 40㎞ 석탄을 실어 나르던 길, 즉 운탄길을 트레킹 길로 만들면서 붙인 이름이다. 강원도는 기존의 운탄고도를 확장한, 영월·정선·태백·삼척 등 4개 시·군의 폐광지역을 잇는 145㎞ 운탄고도 1단계 조성사업을 10월에 완료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강원도 운탄고도는 영월~정선~태백~삼척을 잇는 145km 동서횡단 트레킹 코스로 길어진다. 운탄고도는 과거 석탄을 실어나르던 '운탄길'을 트레킹 코스로 만들면서 생긴 이름이다. 사진은 석탄을 캐면서 땅이 꺼져 생긴 '도롱이연못'으로, 만항재까지 이어지는 정선군 구간의 초입이다. 김홍준 기자
김씨의 2030 시절, 사북은 흥청거렸다. 1973년 밀려드는 탄광 노동자로 인구 2만명 조건을 채우고 읍으로 승격했다. 80년엔 5만명을 훌쩍 넘었다. 사북 안의 고한리는 85년 고한읍이 될 정도로 순식간에 미어터졌다. 당시 인구가 3만2000명으로 꼭짓점을 찍었다.

도롱이연못 근처, 그러니까 해발 1100m에 운락국민학교가 들어섰고 비슷한 높이의 만항마을에는 만항국민학교가 들어섰다. ‘제무시(GMC)’ 트럭은 굉음을 내며 산비탈을 오르내리고 가로질러 석탄을 날랐다.

1960~70년대 석탄산업이 번성하면서 강원도 정선군과 태백시, 삼척시 등에 일꾼이 몰려 인구가 늘자, 기반시설이 속속 들어섰다. 사진은 1967년 해발 1100m인 백운산 도롱이연못 근처에 들어섰다가 석탄산업이 쇠락할 무렵인 1991년 폐교된 운락국민학교의 교문 기둥. 김홍준 기자
석탄을 실은 트럭은 운탄길을 이용해 만항재까지 올라갔다. 만항재 정상에서 운탄길은 지방도로 제414호선(함백산로)과 만난다. 경남 함양~하동 사이 벽소령(1350m, 지방도 제1023호선)이 도로가 난 고개로는 가장 높지만 차는 못 다닌다. 만항재는 '포장'이라는 날개를 달고 가장 높은 자동차도로가 지나는 고개가 됐다. 고한 상갈래에서 만항재를 찍고 태백시 문곡소도동까지 21.8㎞, 함백산로가 굽이친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서 태백시로 넘어가는 함백산로(지방도 414호선) 초입의 연탄가게. 위로는 제천~강릉을 오가며 석탄을 실어나르는 태백선 철로가 지나간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서 태백시로 넘어가는 함백산로(지방도 414호선) 초입의 연탄가게. 경북 영주에서 올라와 20여년간 광부 생활을 한 김태복(73)씨가 가게 일을 보고 있다. 김홍준 기자
김태복(73·고한읍)씨는 이 함백산로의 초입에서 연탄가게를 꾸리고 있다. “가만 있자. 두이, 서이, 너이…. 사북(이곳 사람들은 사북과 고한을 하나로 치기도 한다)에 연탄가게가 네 곳만 남은기라.” 경상도 사투리.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외지인 티를 숨길 수 없었다.

“아, 예 사람들 다 밖에서 온 거라고 보면 되지예. 여기 중갈래, 저 위 진밭골, 만항마을도 마찬가지라. 내도 20년 넘게 구뎅이를 들락거렸지예.” 구뎅이는 탄광 갱도를 일컫는다. 김태복씨는 1977년 경북 영주에서 올라왔다.

함백산로(지방도 414호선)를 따라 강원도 정선군에서 만항재로 올라가면 만나는 진밭골. 이곳의 주민들은 한때 큰꿈을 품고 탄광에서 일했다. 김홍준 기자
73년 강원도 태백시에서 사북으로 넘어와 탄광 일을 했다는 송기원(73·사북읍)씨는 “지금은 산에 숲이 우거져 잘 안 보이지만, 갱도가 수두룩했고 만만치 않은 경쟁률을 거쳐 일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앞서 언급한 김기식씨는 71년에 그나마 가까운 정선읍에서 터전을 옮겨 ‘구뎅이’에 들어갔다.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이곳 사북, 고한에 외지인이 자리를 잡은 건 이미 수백 년 전에도 있었다. 현재 김태복씨의 연탄가게 밑 삼거리, 즉 ‘갈래’는 414번 도로와 38번 도로를 나눈다. 38번 도로를 따라 태백으로 넘어가다 보면 두문동(杜門洞)이 있다.

진길우(67) 강원도 문화관광해설사는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고려의 신하들이 은거한 곳이 현재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기슭의 두문동인데, 그 중 일부가 이 고한에 터를 만든 곳이 또 다른 두문동“이라고 말했다. 이들 모두 나랏일에 나서지 않고 충절을 지켰으니,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고 했다.

옛 도로를 구불구불 따라가다 보면 두문동재(또는 싸리재, 1268m)가 나온다. 남쪽으로 함백산 줄기를 따라가면 만항재가 나온다. 아래위로 1330m, 1268m 높이의 만만치 않은 고개를 거느린 함백산은 해발 1573m다. 남쪽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만항재 고갯마루로 이어지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지방도 제414호선)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정암사가 있다. 김홍준 기자
만항재 고갯마루로 이어지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지방도 제414호선)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 정암사가 있다. 사진은 정암사 자장각 처마 밑에서 수마노탑을 바라본 모습. 2020년 6월 국보(제332호)가 된 수마노탑은 2021년 9월 현재 계측 중이라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다. 김홍준 기자
# 야생화축제, 코로나19 탓 올해는 취소

지난 1일, 함백산로가 지나는 함백산과 백운산 사이의 계곡은 태풍과 가을장마가 부른 물의 과잉으로 괴성을 내고 있었다.
예전 이곳의 냇가는 수천, 수만 탄광 노동자들의 빨래로 검게 변했다. “구뎅이가 남자들의 전쟁터였다면, 빨래터는 여자들의 전쟁터였어요. 드세지 못하면 남편, 아버지의 작업복을 빨 자리를 못 잡았을 정도니까요. 싸우기 싫어서 저처럼 한밤에 빨래를 한 사람도 있었죠.” 이명숙(65) 문화관광해설사는 함백산 정암사 앞에서 근무 중이었다. 사북에서 자란 그는, 아버지가 작은 탄광업체에서 일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어릴 때 하루라도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조마조마했다”라며 “여자들은 남자들이 갱도로 출근할 때 그 앞에 나다녀서는 안 됐는데, 혹시 사고라도 나면 여자 탓이라며 손가락질 받았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는 “어릴 적 꿈이 사끼야마(さきやま, 막장에서 앞장서 탄을 캐는 선산부)에게 시집가는 것이었는데…”라며 웃었다.
만항재 고갯마루로 이어지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지방도 제414호선)에는 1964년부터 운영돼 오다 2001년 폐광된 삼척탄좌를 문화예술단지로 되살린 삼척아트마인이 있다. [사진 삼탄아트마인]
정암사 아래의 거대한 수직갱도에도 선산부(先山夫)가 도끼와 톱을 들고 돌진했을 터. 목숨을 건 대가로 받은 두둑한 수당으로 뒤따르는 후산부(後山夫)에게 돼지고기에 막걸리 한 대접씩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수직갱도는 고요하다. ‘사북 동탄’, ‘고한 삼탄’이라는 말을 만든 동원탄좌와 삼척탄좌는 1980년대 후반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으로 사라졌다. 동원탄좌 근처에는 하이원리조트가, 이곳 삼척탄좌에는 ‘삼탄아트마인’이 들어섰다.

함백산로(지방도 414호선)를 따라 강원도 정선군에서 만항재 고갯마루로 향하다가 보면 우측에 폐광된 삼척탄좌를 아트센터로 되살린 삼탄아트마인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오른쪽의 수직갱도(수갱, 일본어로 '다대꾸')는 이곳의 이정표가 됐다. 김홍준 기자
삼탄아트마인의 수직 갱도 천장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문화사업가 김민석·손화순 부부가 삼탄아트마인을 개관한 때는 2013년. “2001년 10월 폐광된 삼척탄좌를 문화예술단지로 되살렸습니다. 석탄 산업이 사라지면서 침체한 지역 사회에 활기를 일깨워야죠.” 손화순 대표의 말이다. 석탄을 캐느라 검은 물이 흐르던 계곡에 예술이 흐르는 셈이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땅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았다. 매년 열리던 함백산 야생화 축제는 올해 쉬었다. 30년째 만항재 고갯마루에서 쉼터를 운영하는 심경숙(62·고한읍)씨는 “그나마 야생화 축제에 기대를 걸었는데, 요새가 지난 30년 중 가장 힘이 드네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가 다니는 가장 높은 고개인 만항재(1330m)는 강원도 정선군 함백산과 백운산 사이에 있다. 함백산(1573m)은 한반도 남쪽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으로, 여름과 가을에 야생화가 만발한다. 사진 맨 위는 흰송이풀이고 그 아래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투구꽃, 동자꽃, 각시취, 짚신나물, 둥근이질풀, 쑥부쟁이.. 김홍준 기자

쉼터 옆으로 난 운탄고도에서 덤프트럭 3대가 튀어나와 고개 너머 태백 쪽으로 향했다. 함백산로는 1330m 정점을 찍고 영월군에 살짝 들어갔다가 태백시 쪽으로 내려선다. 다시 고개 아래, 김태복씨의 연탄가게에는 연탄이 별로 없다. 그는 “예까지 개스(도시가스)가 들어오제, 사람도 없제, 누가 사겠능교?”라고 반문했다.
강원도 정선군 만항재 고갯마루의 쉼터 옆으로 운탄고도가 보인다. 그 오른쪽에 만항재 표지석이 서 있다. 김홍준 기자
강원도 영월군 상동의 장산콘도 레스토랑. 함백산로(지방도 414호선)를 따라 정선군에서 만항재 고갯마루를 찍고 태백시로 넘어가다가 만날 수 있다. 경남 하동에서 올라온 배재득(50)씨가 2006년 콘도를 인수해 4년 전 리모델링을 거쳐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배씨는 ″태백산, 함백산, 장백산(장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명당″이라고 설명했다. 김홍준 기자
지난 8월 기준 사북의 인구는 한창때의 10분1 수준에도 못 미치는 4700명. 1년 새 122명이 줄었다. 고한은 1년 전보다 315명이 줄어든 4409명이다. 2019년~2020년 이곳을 포함한 정선과 삼척·영월·태백의 폐광지 인구는 2% 줄었다. 지난 10년간 한 해 평균 감소폭(0.9%)의 두 배 수준이다.

만항재 밑 만항마을. 야생화마을로 변모한 동네다. 이곳의 한 70대 여성이 말했다. “내가 탄좌에서 세탁도 하고, 운탄도 했소.” 옆에 있던 다른 70대 여성이 받아쳤다. “다 지난 일을 뭘 자꾸 꺼낸대?” 지난 일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3년만 버티자더니, 50년이 지나버렸다.

■ "지난 10년, 앞으로 10년…삼탄아트마인의 완성은 끝이 없다"

「 “폐광이라는 과거의 산업적 공간과 예술이라는 현재의 문화적 욕구를 결합했습니다.”

손화순(63) 대표는 불모지 같은 폐광에 문화예술의 꽃을 기르고 있다.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의 ‘삼탄아트마인’에서다. 삼탄은 삼척탄좌의 줄임말이다. 정식 이름은 삼척탄좌 정암 광업소로, 정선을 대표하는 광산이었지만 2001년 문을 닫았다. 경쟁력 있는 업체만 살리자는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의 영향이었다.

손 대표는 남편 고(故) 김민석 대표와 한국판 ‘테이트 모던 갤러리’를 꿈꾸며 이곳에 ‘예술 광산(art mine)’을 꾸미기로 했다. 테이트 모던 갤러리는 영국 런던의 낡은 화력발전소 건물을 개조해 현대 미술 전문 전시장으로 꾸민 곳이다.

Q : 광산이 문 닫은 지 10년 만에 삼탄아트마인(이하 아트마인)에 착수했다.
A : 2011년부터 기획, 설계에 들어갔으니 폐광 10년 만이다. 1년간 기획을 했고 다음 1년간 공간 설계에 들어갔다. 하지만 2013년 65% 완성될 때 개관했다. 통상 리뉴얼은 신축보다 많은 공을 들이는데, 삼탄의 과거 모습을 살리자니 변수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아트마인 주차장에서 관객들은 4층, 3층, 2층, 1층 순으로 내려선다. ‘마인갤러리1’ ‘마인갤러리4’ ‘삼탄자료실’ 등을 지나며 역사와 예술과 조우한다. 예전 광부들은 1층 ‘세화장’에서 작업용 장화를 씻었다. 2층 ‘샤워실’에서 탄가루로 범벅이 된 몸을 닦은 뒤, 탄광 시설의 동력을 관리하던 3층 ‘종합운전실’을 지나쳐, 4층으로 퇴근했다. 현재의 관객과 역순이다.
만항재 고갯마루로 이어지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지방도 제414호선)에는 1964년부터 운영돼 오다 2001년 폐광된 삼척탄좌를 문화예술단지로 되살린 삼척아트마인이 있다. 광부들의 장화를 세척하던 '세화장'에 조명을 설치해 예술로 탈바꿈시켰다. 김홍준 기자

세화장 위의 장화는 당시의 정지한 시간을 보여주지만, 바닥에서 새어 나오는 색색의 빛은 현재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샤워실의 옷 풀어헤친 조각들은 정지해 있지만, 드라마 ‘태양의 후예’ 영상은 쉴 새 없이 돌아간다. 아트마인은 ‘태양의 후예’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Q : 쉽지 않은 길이다.
A : 아트마인은 광산 시설을 최대한 활용하되, 과거의 공간인 점을 고려해서 현재의 시각으로 집대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화예술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2011년부터 10년간은 보존 공간 활용과 소생이라는 1, 2단계 마스터플랜을 구현한 시기다. 지금은 3단계 준비 시기다. 이곳을 관광지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재미와 역동성을 추구하려 한다. 4단계는 산업문화유산인 아트마인의 교육적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 문화사업은 시간이 필요하다. 완성도가 어느 정도 빛을 발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중요하다. 100% 완성이란 건 사실 없다. 5, 6단계도 생길 것이다.

아트마인의 53m 수직 갱도 권양기와 조차장에는 석탄을 실어 나르던 탄차, 인부들이 타고 이동하던 인차, 업무상황판 등이 그대로 있다. 천장에는 ‘우리는 가정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그 속에 직장을 사랑한다’는 사훈(社訓)쯤 되는 격문이 걸려있다. 생생하다. 광부 두 명이 꽃 앞에서 도시락을 꺼내먹는 작품이 이 ‘레일 바이 뮤지엄’ 출구 쪽에 있다. 천장에서 새어 들어오는 비가 그들의 어깨 위에 떨어진다. 가족을 위해 갱도로 뛰어들었던, 그들의 무거웠던 어깨였다.
만항재 고갯마루로 이어지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함백산로(지방도 제414호선)에는 1964년부터 운영돼 오다 2001년 폐광된 삼척탄좌를 문화예술단지로 되살린 삼척아트마인이 있다. 사진은 해발 832m의 수직갱도에서 도시락을 먹는 광부들의 모습을 예술로 재현한 모습. 김홍준 기자

“코로나요? 아트마인의 위기이기는 하지만 코로나 이후의 콘텐트를 생각하고 도약할 기회로 생각해요.” 지역 경제 소생의 한 축을 떠받들고 있는 손 대표의 어깨가 무겁지만은 않을 것이다.

김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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