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터 할매 자부심 담긴 능이, 며칠을 먹어도 안 질려"

서정민 2021. 9. 18.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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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부부의 제철 음식 이야기
도자기 굽는 신경균씨(왼쪽)와 동갑내기 아내 임계화씨가 준비한 가을 제철 요리가 장작불 위 가마솥 뚜껑에서, 화로 위 석쇠에서 맛있게 익고 있다. 박종근 기자
추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초가을 저녁. 쨍했던 햇볕이 사라지자 남편이 마당에 장작불을 지핀다. 활활 타오르던 불이 벌건 숯만 남긴 채 기세를 죽이자 남편이 외친다. “계화씨, 생선 올려도 되겠네.” 평상에서 능이버섯을 다듬던 아내가 부엌에서 생선과 석쇠를 꺼내 뛰어온다. “경균씨, 우리 두 마리는 석쇠에 굽고, 세 마리는 가마솥 뚜껑에 기름 두르고 지질까?” 그러자 남편은 묵묵히 가마솥 뚜껑을 찾는다. 어느새 어둠이 조용히 내려앉은 마당에선 타닥타닥 불씨 터지는 소리, 도란도란 부부의 이야기 소리, 향긋한 장작 냄새가 퍼진다.
비자나무 열매는 아내 임계화씨의 비법 강정 재료다.
군침 도는 이 소박한 저녁 풍경의 주인공은 도예가 신경균(58)씨와 아내 임계화(58)씨.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국보가 된 이도다완(井戶茶碗·‘고려다완’이라고도 부른다)을 재현해 명성을 떨친 장여(長如) 신정희(1930~2007) 선생의 3남인 신씨는 중2 때부터 물레를 돌렸다. 부산산업대(현 경성대)에서 도자기를 공부하며 석사까지 마친 그는 1991년 부산 기장에 장안요(長安窯)를 짓고 소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피는 전통 흙가마 방식으로 도자기를 빚고 있다. 2005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공식 회의장에 한국 도자를 대표하는 작가로 초대됐고, 2014년에는 동양인 최초로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도자기 전시를 열었다. 2018년 평창겨울올림픽 때는 독일 대통령에게 그의 달항아리가 선물로 전달됐다. 그의 도자기를 아끼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신경균의 도예에는 한국 특유의 선(線)의 예술이 흐른다”며 “무엇보다 달항아리의 허리를 잘라 두 동강 낸 것 같은 그의 백자 사발을 보라. 조선조 백자의 특성을 그대로 살린 약간 이운 그 윤곽선과 몸체의 실루엣은 선의 예술이 보여주는 극한”이라고 평했다.
식구들이 좋아하는 가을 제철 식재료는 능이버섯이다.
그런 그가 최근 『참꽃이 피면 바지락을 먹고』(브.레드)라는 수필집을 냈다. 365일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살며 그릇 굽고, 절기 맞춰 계절 음식을 챙겨먹는 이야기다. “수수한 집밥일 뿐이지만 제철에 나는 것은 풍성해 이웃과 지인들이 오가며 함께 먹기 좋죠.”

기자가 기장으로 내려간 날, 부부는 5일장이 열린 남창시장에서 능이버섯과 눈볼대 생선을 사왔다. 장터에서 있었던 이야기 한 토막만 들었는데도 활기차고 정겨운 시골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용은 이렇다. 장터 할머니들에게 공정 무게나 가격은 없다. 조그만 접시 3개에 능이버섯을 소복이 담아 파는데, 양은 조금씩 달라 보이는데도 가격은 같다. “할매, 이거 무게가 1kg이 안 될 것 같은데?” “1kg, 그런 거 난 모른다. 난 항상 요만큼씩 담아서 그 가격 받았으니까 안 살라면 가라.” 소주 친구인 할매와 농담 같은 ‘밀당’ 끝에 사온 능이는 꽃처럼 싱싱하고 촉촉해 보였다.

쇠고기와 볶으면 맛도 식감도 어느 게 고기인지 버섯인지 헷갈린다.
부부는 탱탱한 눈볼대도 보여줬다. 부산에선 일본어 ‘아카무츠’라고도 불리는 생선인데 살이 달고 부드러운 게 일품이다. 고 신정희 선생이 손주들 손잡고 시장에 나가 자주 사던 생선이다. 20대 청년으로 장성한 두 아들은 생선 이름 대신 ‘할아버지 생선’이라 부른다. “아버지와 애들 밥상에 오르는 날엔 말 한마디 없이 조용했죠.”(웃음) 적당히 열기 품은 숯불에 직접 구운 생선은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가마솥 뒤집어 기름 두르고 지져낸 생선에선 고소한 향이 난다. 밥상 위에 오른 5개뿐인 생선 눈알은 어느새 사라졌다.

장터 할매 자부심 가득한 능이버섯 맛도 만만치 않다. 신씨가 “며칠 연달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이라 극찬하는 식재료다. 옛날에는 큼지막한 소쿠리 하나에 몇만 원 정도였는데, 요즘은 너무 귀해져서 송이버섯 가격을 70%까지 따라잡았단다. 그래도 능이버섯을 안 먹고 지나는 가을은 있을 수 없다. 부부는 가을이면 능이버섯을 100kg쯤 산다. 식구 모두 좋아하는 데다 장안요에 놀러온 친구·지인들과 먹고 또 선물하기 위해서다.

칼로 밑동을 잘라내고 먹기 좋게 죽죽 찢어 고기 굽듯 숯불을 피워 석쇠에 구우니 고기 맛 저리 가라다. “싸리버섯은 닭고기 맛, 표고버섯은 돼지고기 맛이 난다면, 능이버섯은 쇠고기 맛이 나죠.” 오늘은 쇠고기와 함께 소금으로만 간을 해서 살짝 볶아냈다. 접시 가득 담아낸 볶음을 먹고 있자니 색깔도, 맛도 어느 것이 고기고 어느 것이 버섯인지 모르겠다. 미끌하고 쫄깃한 덩어리를 씹었을 때 숲 향기 가득 터지면 이게 능이버섯이구나 짐작할 뿐.

“특별히 장을 본 건 아니고 그저 집에 있던 것들”이라며 내놓는 반찬들 또한 진수성찬이다. 뼈가 전혀 씹히지 않는 병어김치, 이젠 시장에서도 쉽게 살 수 없는 군소 데침과 조림, 그리고 전어회 사이로 젓가락질이 바쁘다. 반주로 벌써 넉 잔이 돌았는데 취기는 택도 없다.

신씨의 두 아들이 ‘할아버지 생선’이라 부르는 눈볼대. 박종근 기자
오늘은 아내가 더 분주했지만 사실 신씨의 요리솜씨는 웬만한 요리사 뺨친다. 어느 해 봄, 법정 스님이 장안요에 들렀을 때 일화가 재밌다. 나물 맛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법정스님 밥상에 올릴 반찬을 누가 만들 것인가, 함께 온 일행까지 모여 옥신각신 할 때 신씨가 나섰다. “뭐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되지.” 취나물·참나물·다래순 등 나물 몇 가지를 절에서 배운 대로 오신채 넣지 않고 국간장·된장·참기름으로 단순하게 무쳐 대접했더니 법정 스님이 “이 집 나물 참 맛있다! 계화 결혼 잘했네” 칭찬하셨단다.

신씨는 이번 책을 쓰면서 “좋은 그릇 이야기보다 좋은 음식 이야기가 더 쉬워서 그릇 이야기, 음식 이야기를 함께 버무렸다”고 했다. 음식 만드는 것과 그릇 만드는 게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도자기 빚을 흙을 발견할 때처럼 시장에서 좋은 식자재 고르는 과정은 신중하면서 또 즐겁다. 화탕지옥의 불과 벗해야 하고, 자연이 주는 그대로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도 같다. 무엇보다 세월이 흐를수록 신씨의 손에서 간소하고 담백해지는 게 똑같다.

쉬는 계절의 가마 사정과 사계절 식재료 때문에 사진 촬영에만 1년이 걸렸다. 책장을 넘기며 몰랐던 식재료와 조리법에 무릎을 치고, 부부와 가족들의 맛있는 추억에 가슴이 절로 따뜻해진다.

“부산 사람이 좋아하는 생선, 고흥 사람이 좋아하는 생선이 다르고, 세월 따라 양념과 조리법이 달라져도 누구에게나 어느 음식을 먹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장면이 있죠. 입맛을 닮은 건지, 함께 먹던 그날 그때의 분위기를 기억하는 건지. 좋은 사람들과 함께 먹는 밥상에선 언제나 좋은 추억이 가득하죠. 사는 데 그거면 됐지요.”(웃음)

기장=서정민 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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