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예린이 고백한 음악 취향 '선물'
아이즈 ize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예술하는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의 그늘, 어떤 작품의 영향 아래 있다. 나 혼자 다 했어, 이건 오직 나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예술가는 가짜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창작은 모방을 전제한다. 다만 그걸 얼마나 티나지 않게 하는 지가 관건이다.
음악에서 누군가의 것을 다시 만지는 작업(리메이크)은 그래서 '모방적 창작'의 극치라 할 수 있다. 리메이크는 모방을 본질로 하면서 창작도 수확해내는 꽤 매력적인 시도다. 다시 만들고 다시 부르는 사람의 진심과 흠모가 그 안엔 담겨 있다. 이 작품 '선물'도 그렇다. 토이와 검정치마, 이영훈과 장기호, 넬과 이한철, 그리고 소히를 데려온 작품의 주인공 백예린은 "이 곡들을 다시 부르며 내가 느낀 것들을 담았다"고 말했다. 역시 리메이크란 리메이크를 하는 당사자에 새겨지고 그가 받은 '흔적과 영향'을 돌아보는 일이다.
그런 면에서 백예린의 '선물'은 아이유의 '꽃갈피' 시리즈를 떠올리게도 한다. 다른 점이라면 아이유는 스마트폰이나 폴더폰은 고사하고 무선호출기도 없던 시절의 댄스, 발라드, 포크 곡들에 메스를 가한 반면 백예린은 토이의 '그럴 때마다'를 뺀 모든 선곡을 2000년대와 2010년대에서 한 것이다. 이 말은 20세기에 비해 아직 덜 멀어보였던 2000년대와 2010년대의 작품들도 조금씩 '유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신호인데, 그렇다면 아이유는 거의 고고학에 가까운 발굴을 한 셈이다.
'선물'은 백예린이 부른 백예린의 작품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상 그의 밴드 발룬티어스(The Volunteeres)의 작품에 가깝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발룬티어스의 베이시스트인 구름(고형석)과 백예린의 합작품이랄까. 구름은 첫 곡 '그럴 때마다'와 끝 곡 '산책'이 키보드 어레인지로 수미상관을 이루는데 중심이 된 인물이며, 모든 곡들이 갈 방향을 백예린에게 제안한 이 작품의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발룬티어스의 기타리스트 조니(Jonny)와 드러머 김치헌도 여기에 참여했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참여'만 했을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백예린의 몫이다. 구름의 프로듀싱이 생명을 얻기 위해선 백예린이 노래를 불러야 한다.
앨범의 문은 토이의 '그럴 때마다'가 연다. 구름과 백예린은 그러나 원곡을 밀어내며 이 곡을 받아들인다. 구름은 프로그래밍 된 비트와 건반 리프, 멜로디언 솔로를 모두 무시하고 오로지 그윽한 키보드로만 이 트랙을 채웠다. 노래는 일곱 명이 부른 것을 백예린 혼자 쓸쓸히 불렀는데, 마치 6년을 사귄 여자 친구와 이별한 원작자의 아픔을 반영한 듯한 모양새다. 백예린은 이 곡을 가사에 충실하며 불렀다고 했다.
첫 곡에서 예고됐듯 구름과 백예린의 리메이크는 담백하다. 덧붙이거나 비트는 대신 깎아내고 바라본다. 그 소극적 관조가 대담한 도전으로 거듭나는 건 아마도 음악의 묘미일 터. '두근두근 내 인생'을 더 두근거리게 만든 곡으로 소설 팬들에겐 기억될 검정치마의 'Antifreeze'도 마찬가지다. 구름은 일단 우주적이고 동화적이었던 신시사이저 연주를 과감하게 빼버렸다. 역동적 인트로가 사라진 자리엔 텁텁한 드럼 루프와 소박한 키보드 연주가 흐른다. 이 선택은 곡의 전체 인상을 바꾸어버리며 시작부터 조휴일의 그림자를 걷어낸다. 이어 드럼은 더 선명해지고 믿음직한 베이스와 상쾌한 기타가 냇물처럼 곡 마디마디를 흘러간다. 물론 편곡에 집중한 만큼 가사는 건들지 않았으니 "해와 달이 겹칠 때"나 "너와 나의 세대가 마지막이면 어떡해" 같은, 상상에 기댔지만 실상을 바라보게 하는 뭉클한 정서와 도발적이면서 따뜻한 은유만큼은 그대로 지켰다. 백예린은 부친(크레디트에는 '아부지'로 쓰여 있다)과 지인들을 코러스에 동원해 이 곡에 다정함을 입혔다.
'돌아가자'는 "루시드폴의 감성과 조규찬의 서정미, 이병우의 소리"를 들려준다고 홍보된(그는 실제로 '하품'이라는 곡을 조규찬에게 헌정했다) 이영훈의 두 번째 음반에서 가져온 것이다. 백예린이 스무 살때 즐겨 들었다는 이 곡은 하늘거리는 보사노바 장르로 옷을 갈아입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던 원곡의 무심함이 사라진 건 아쉽지만 리메이크라는 것이 본래 익숙한 것에서 다른 것을 끄집어내는 일일 테니 이상의 왈가왈부는 덧없을 일이다.
장기호식 'Kissing A Fool'(조지 마이클)인 '왜 날?'에서 웬일인지 백예린은 물음표를 '왜' 뒤에 붙였다. 물음표 위치 하나 바꿨을 뿐인데 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상대에게 따지고 드는 가사의 절박함에 힘이 실린다. 빛과 소금의 장기호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 곡을 불렀다는 백예린은 원작의 나풀거리는 재즈 피아노와 색소폰 솔로를 지우고 자신이 잘하는 팔세토를 곁들여 '노래'를 강조했다.
팔세토 하면 또 넬의 보컬 김종완을 빼놓을 수 없을 일. 백예린은 '한계'를 부르며 김종완만이 들려줄 수 있는 노래 자체 즉, 울음과 설움에 절여진 팔세토에 존경을 보내고 있다. 사실 '한계'가 수록된 'Healing Process'에는 'Counting Pulse'나 '마음을 잃다' 같은 곡들도 있지만 백예린은 스스로 공감했고 위로받은 노랫말을 가졌다는 이유로 '한계'를 골랐다. 선택은 옳았다.
흘러흘러 앨범의 끝엔 가사를 쓴 소히의 이야기가 백예린을 슬프게 만들었다는 '산책'이 있다. 백예린은 이 곡을 이한철 버전으로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앨범 '선물'을 통해 우린 백예린의 음악 취향도 엿본다. 그 취향에는 비슷한 점이 있다. 담담하게 헤어진 사람을 그리워하는 '산책'의 이한철처럼 일단 선택된 모두가 싱어송라이터이고 보컬 음색과 음악 스타일, 노랫말 면에서 자신들의 확고한 방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곡들은 모두 사랑과 이별을 다뤘다. 어쩌면 '선물'은 백예린이 앞으로 추구해나갈 음악 철학을 부분으로나마 고백한 것이 아닐까. 이한철 버전에 이어 소히가 부른 '산책'을 들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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