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아프간 민주화, 포기 이르다
2003년 4월 6일 아프가니스탄 남부 자불 주에서 탈레반이 자살 폭탄 테러를 벌였다. 지역 학교 여학생들에게 교과서를 기증하러 가던 일행을 노렸다. 이 공격으로 스물다섯 살의 미국 여성 외교관 앤 스메딩호프가 숨졌다. 존스홉킨스대에서 국제관계를 전공하고 국무부에 들어온 그에게 아프간은 두 번째 임지였다. 아프간 소녀들의 교육 여건 개선에 팔을 걷어붙였고, 국가대표 여성축구팀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추진했을 정도로 현지에 애착을 가졌다.
미국이 아프간을 완전히 빠져나간 다음 날인 지난달 31일. 스메딩호프의 고향 마을 일리노이주 리버 포레스트 지역신문은 그의 행적을 재조명하는 칼럼을 게재했다. 20년 만에 다시 탈레반 시대로 돌아간 아프간 사태가 가슴 아픈 까닭 중 하나는 스메딩호프처럼 아프간의 재건과 자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젊은이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육군 고(故) 윤장호 하사도 그런 경우다. 중학교 2학년 때 유학을 떠나 인디애나대에서 회계학·국제관계학·부동산학 등 3개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 자원 입대했다. 스물일곱이던 2007년 아프간 파병 복무 중 미 공군 바그람기지에서 현지 기능공들을 인솔하다 탈레반 자폭 테러에 희생됐다. 미군은 바그람 기지에 있던 사제폭발물 훈련센터를 그의 이름으로 명명하며 추모했다.
외국 젊은이들만 스러진 것이 아니다. 지난달 26일 또 다른 이슬람 무장단체 IS 호라산이 카불 공항에서 벌인 자폭 테러로 희생된 170여 명 중에는 스물다섯 살의 태권도 선수 모하메드 잔 술타니도 있었다. 카불이 함락되자 그는 태권도 국내 챔피언 인증서를 움켜쥐고 아내와 어린 두 자녀를 데리고 카불 공항으로 달려갔다. 안전이 우려돼 가족들에게 몇 발짝 뒤떨어져 따라오게 했고, 이 판단 덕분에 가족들은 살릴 수 있었지만 그는 짧은 삶을 마감했다. 시절을 잘 탔다면 국제대회에서 국위를 선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프간의 재건을 위해 힘쓰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다 스러져간 젊은이들의 사연은 더 많을 것이다. 이들이 지켜내려 한 정부는 무너졌고, 국제 사회는 탈레반을 집권 세력으로 용인할지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 수많은 희생은 결국 헛된 것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탈레반이 입에 발린 소리일지언정 여성 권리를 존중하겠다고 공언한 것, 과거와 달리 국제사회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는 것, 이런 변화는 20년간 아프간 재건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방법이 문제였을지언정 방향은 옳았음을 보여준다.
한국도 아프간 민주 정부 재건에 많은 힘을 보탰던 서방 진영의 일원이며 아프간 청년의 희망의 끈이었던 태권도 종주국이다. 협력한 현지인들을 신속히 국내로 데리고 와 새 출발을 도왔다. 기로에 선 아프간이 옳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힘을 모으는 데 앞으로도 우리의 의미 있는 역할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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