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서의 글로벌 아이]남군 사령관 로버트 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박영서 입력 2021. 9. 16.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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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부 버지니아주(州) 주도 리치먼드 중심부에 우뚝 서 있던 옛 남부연합군(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에드워드 리 장군의 동상이 철거됐다. 설치된 지 131년 만이다.

지난 8일 오전 8시 54분(현지시간) 타워크레인이 높이 6.4m, 무게 12톤짜리 청동 기마상을 받침대에서 끌어올렸다. 기마상은 받침대에서 분리된 뒤 허리 부분에서 두 동강이 난 뒤 철거됐다. 운반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동체는 두 동강 났다. 작업을 지켜보던 시민 수백명은 환호성을 쏟아냈다.

현장에 있던 흑인 인권운동가 게리 플라워스는 "드디어 '뱀의 머리'가 제거됐다"고 말했다. 민주당 소속인 랠프 노섬 버지니아주 지사는 "남부의 잃어버린 대의를 찬미하는 유물은 철거해야 한다"면서 "버지니아에 새로운 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번 철거로 동상을 둘러싸고 100년 이상 지속된 '혼란의 역사'는 마감됐다. 인종차별 청산을 목표로 하는 미국에 있어 이는 기념비적 사건일 것이다. 남겨진 화강암 받침대는 단결과 인권을 호소하는 메세지로 덮였다.

131년간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가 마침내 쓰러진 리 장군,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경기병(輕騎兵) 해리'로 알려진 독립전쟁의 영웅 헨리 리의 아들이다. 헨리 리는 미국독립전쟁에서 기병대장으로 활약했고 후엔 버지니아 주지사를 지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재산 관리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아버지가 일찍 죽자 가정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대학에 갈 만한 여유가 없었던 리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육사를 2등으로 졸업한 그는 멕시코 전쟁(1846~48)에 참모로 참전해 능력을 발휘했다. 이후 웨스트포인트 교장을 맡았다.

그는 군인이자 광활한 농장의 주인이기도 했다. 오만하고 거만한 사람이 많았던 남부 노예 농장주 중에서 그는 보기드문 인격의 소유자였다. 온화하고 성실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리는 다른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백인과 흑인의 인종적 평등을 믿었던 적은 없었다. 흑인의 투표권도 당연히 반대했다. 다만 노예제가 남부 백인을 도덕적으로 타락시키고 있다고 믿었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노예제는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사악한 제도"라고 썼다. 또한 노예제가 남북 간 분열을 낳고 있음을 깊이 우려했다.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리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점차 연방을 탈퇴하는 주들이 늘어났다. 링컹 대통령은 리에게 탈퇴한 주들을 연방에 강제 복귀시키기 위해 새로 편성되는 군대(북군)의 지휘관을 맡아달라고 제의했다. 당시 버지니아주는 연방을 탈퇴하지 않은 상태였다. 리는 제안을 거부했다. 고향 남부사람을 향해 총을 들이댈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는 36년간 몸 담았던 군에서 나왔다.

남북전쟁이 터지자 그는 남부연맹에 투신해 북버지니아군의 사령관이 됐다. 사령관으로서 리는 온화한 성격과는 달리 대담한 전술을 자주 사용했다. 위험을 즐기는 성향과 온화한 성격은 절묘하게 결합되어 군심 장악에 큰 효과를 발휘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과감하게 권한을 이양했고 최종 책임은 자신이 졌다. 거드럼 피우고 교만하며 의사소통이 부족했던 남군의 다른 고위 장성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리는 전쟁이 끝나갈 무렵 남군 총사령관에 임명됐고 그때까지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스 그랜트를 무척이나 괴롭혔다. 하지만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1865년 4월 9일 버지니아주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에서 리 장군이 항복하면서 남북전쟁은 사실상 종결됐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고향 버지니아로 돌아가 렉싱턴에 있는 워싱턴컬리지(현재의 워싱턴 앤드 리 대학) 학장으로 활동했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남부의 복구와 인재 육성에 힘을 기울이면서 여생을 마쳤다.

패장이었음에도 그는 남부 사람들 사이에선 북부 '양키'들과 싸웠던 '존경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사망한 후 '성인'(聖人)의 반열에 올라섰다. 남부 여기저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그의 이름을 딴 도시, 거리, 학교가 생겨났다.

리 장군은 누군가에겐 자랑스런 인물이었지만 누군가에겐 고통스런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동상들은 '인종차별의 상징'이 되어 격렬한 규탄과 함께 철거되고 있다. 조지 플로이드라는 한 흑인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자취는 뽑혀 나가고 있다. 뽑힌 자리엔 아무것도 없지만 인종차별은 여전하다. 그는 바람과 함께 사라졌지만 아직도 '차별'의 깃발은 펄럭이고 있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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