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정약용·동학농민이 넘은 고개..옛길 6곳 '명승' 된다

김종목 기자 2021. 9. 16.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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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관동대로 구질현의 V자형 지형. 문화재청 제공

고려·조선 시대 옛길 6곳이 명승이 된다. 문화재청은 16일 ‘삼남대로 갈재’ ‘삼남대로 누릿재’ ‘관동대로 구질현’ ‘창녕 남지 개비리’ ‘백운산 칠족령’ ‘울진 십이령’ 옛길의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지정을 예고했다.

옛길은 고려 시대에 통치 목적으로 건설된 역로(驛路)를 가리킨다. 이 길들 중 상당수는 조선 시대에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을 연결한 국가 기간시설이었다.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 당시 옛길이 신작로로 바뀌는 과정에서 본래 모습을 잃었다. 남은 옛길마저 후대에 임도(林道)로 사용되면서 훼손된 경우가 많다.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옛길엔 옛 역사, 문화, 인물 이야기가 쌓여 있다. 삼남대로는 한양과 삼남지방(충청·전라·경상)을 이어준 길이다. 전북 정읍의 삼남대로 갈재는 고려 현종이 1010년 거란의 침입 당시 나주로 피란 갈 때 이용했다. 송시열이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사약을 받기 전 마지막에 넘은 고개이기도 하다. 동학농민군이 1894년 장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이 고개를 거쳐 정읍으로 향했다. 전남 강진의 삼남대로 누릿재는 해남, 제주 등지로 유배를 떠나는 이들의 경로였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월출산과 누릿재를 두고 여러 시와 글을 썼다.

경기 양평의 관동대로 구질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질현(仇叱峴)’이라 기록됐다. <광여도>는 ‘구존치(九存峙)’로 표기했다. 지형이 험해 ‘아홉 번은 쉬고 나서야 고개를 넘을 수 있다’며 ‘구둔치’라고도 불렸다. 1940년대 중앙선 개통 이후에도 주민들은 기찻삯을 아끼려고 옛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경남 창녕의 남지 개비리는 소금과 젓갈을 팔던 등짐장수와 인근 지역민들이 생활길로 애용했다. 개비리는 ‘개가 다닌 절벽(비리)’ 또는 ‘강가(개) 절벽(비리)에 난 길’이란 뜻이다. 옛사람들은 강물이 차오르고, 경사가 아슬한 이 길을 생계 때문에 올랐다. 강원 평창의 백운산 칠족령은 1960년대까지 동강을 통해 소백산 일대 금강송을 서울로 운송하던 일꾼들이 애용했다. 경북 울진 십이령은 봉화 인근 내륙의 생산품과 울진 인근의 해산물을 교역하던 십이령의 일부다. 조선 후기 문신 이인행(李仁行·1758~1833)은 <신야집(新野集)>에서 유배지까지의 여정 중 겪었던 험한 길 중 십이령을 첫 번째로 꼽았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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