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5·18 5인방의 침묵
[경향신문]
사람마다 5월 광주의 진실을 맞닥뜨린 때가 다를 것이다. 나는 대학 입학 후 맞은 첫 5월이었다. 사복경찰이 캠퍼스에 숨어 있던 36년 전 5월, 대형 강의실 외벽에 ‘광주학살 원흉 지도’가 붙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정점으로, 수십명의 신군부 지휘체계가 넓은 벽을 가득 메웠다. 올해 아흔이 된 전씨의 육사 동기들(11기)과 선배들, 5·18 당시 광주에 내려간 장세동(특전사 작전참모)·박준병(20사단장)씨, 전씨의 수족 ‘스리 허’(허삼수·허화평·허문도)는 그 위치까지 생생하다. 다음날 학생회관에서 5·18 동영상을 봤다. 중·고교에서 배우지 못하고, 언론에서 접하지 못한 5·18의 첫 기억은 지금도 그 대형지도와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그 지도 속 ‘수뇌부 5인방’이 5·18 진상조사위가 요구한 대면 조사에 불응했다. 지난 1일 “2주 안에 답을 달라”며 보낸 서안에 응답하지 않은 것이다. 5인방은 전두환과 노태우(수도경비사령관)·정호용(특전사령관)·이희성(계엄사령관)·황영시(육군참모차장) 등이다. 혈액암 투병을 하며 법정에서 ‘몸통’임을 부인하는 전씨는 그렇다치고, 지난 2~3월 ‘5·18 가해책임자 재조사’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조사위에 낸 정씨도 답신이 없었다. 진정서에 “5·18 진압은 보안사가 주도했고, 헬기 작전 얘기도 들었다”며 전씨가 하지 않으면 직접 광주 5·18묘지를 찾아 사과하겠다고 적었던 맘이 그새 어찌 된 것일까. 아들 재헌씨가 3년째 광주를 찾아 사죄한 노씨도 오랜 투병 중에 조사는 마다했다. 시간과도 싸워야 할 진상 규명의 문 앞에서 모두 침묵을 택한 것이다.
5·18은 부단히 진실이 벗겨지고 있다. 민간인 공격, 시신 행방불명, 계엄군 명령체계에 대해 진전된 증언을 한 진압군이 200명을 넘는다. 15일 전씨 항소심 법정에선 “전남도청 앞에서 군인을 친 장갑차는 시민이 아니라 계엄군이 급후진하다 일어난 사고”라는 진압군(이경남 목사)의 첫 증언도 나왔다. 발포 명령 발원점만 마침표를 못 찍고 있는 것이다. 조사위는 방문조사에 불응한 수뇌부 5인에게 추가 요청 후 동행명령·검찰고발 카드도 열어놓고 있다. 5·18의 치유와 해원(解寃)은 진실 고백에서 시작돼야 한다. ‘난(亂)’을 일으킨 무신 5인방의 참회와 증언을 고대한다.
이기수 논설위원 k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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