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 칼럼] 우리는 어떤 길을 낼 수 있을까?

한겨레 2021. 9. 1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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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 칼럼]며칠 뒤 남편한테 주아프가니스탄 대사관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전화가 와서 함께 당황했다. 남편은 10년 전쯤 코이카 프로젝트로 아프가니스탄에 의료보험을 도입할 수 있도록 시범사업을 도우러 간 적이 있는데 통역 겸 어시스턴트로 함께 일한 파트너의 이름과 일한 기간을 확인해 달라는 전화였다. 곧이어 미국의 아프간 철수가 숨가쁘게 진행되었고 우리는 '아프간 특별기여자'를 선심 쓰듯 맞아들였다.

조은|사회학자·동국대 명예교수

마지막 칼럼을 물음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코로나 팬데믹과 환경위기와 앞이 막막한 글로벌 정세와 요동치는 국내 정치판 속에서 길을 잃는 느낌에 자주 빠진다. 거기서 벗어나 여행하는 기분으로 가족이 함께 성묘길에 나섰다. 여정을 스케치하듯 가볍게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무거운 글이 될 것 같다. 개별 가족사를 칼럼 소재로 가져오는 부담 때문에 ‘사회학자스러운’ 무색의 소재로 돌아갔다가 밀어내고 돌아오기를 수차례 했다. 가족사는 개인과 사회구조의 교차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유효한 사회사적 자료이고 후대의 길을 묻는 구체적 사유의 지점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부담을 감내하고 쓰기로 했다.

어머니 1주기에 세운 상석에는 “마음으로 여기 오신 아버지와 그리움으로 사신 어머니를 함께 기립니다”라고 썼다. 산일을 맡은 조카에게 할아버지가 가신 해를 1950으로 쓰고 괄호를 닫는 대신 별표*로 마감하라고 말했다. 우리 가족이 아버지를 못 보게 된 것은 1950년이 맞지만 그렇다고 아버지가 1950년에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어서다. 그 옆에는 1950년 겨울에 고향에서 가신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산소가 있다.

선영에서 나와 백수 해안도로로 들어서기 전 길목에 매의 바위라는 절벽이 있는데 그 앞에 차를 세웠다. 거기에는 ‘응암선유’(鷹岩船遊)라는 한시와 ‘응암에서 뱃놀이’라는 우리말로 풀어 쓴 시비가 있다. 몇 해 전 50년 만에 고향을 찾게 되었을 때 지인이 증조부 시비라고 안내해 주었다. 시를 쓴 이의 출생연도는 1862년으로 쓰여 있는데 사망연도는 ~로 표시된 채 비어 있다. 군에서 시비를 세우게 되었을 때 글쓴이의 사망연도를 확인해 줄 후손을 못 찾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이 시비 앞에서 큰아들이 “할머니의 증조할아버지라는 분이 쓰신 시, 말하자면 아빠의 외조부의 조부 되시는 분이 쓴 시”라면서 자기 아들에게 신기해하기를 주문했지만 아이는 눈만 껌벅거렸다. 할머니의 증조할아버지가 이 고을에 근대 교육을 시작한 한말 개신(改新) 유학자라고 덧붙일까 아니면 사망연도가 비어 있는 연유를 설명할까 망설이다가 말없이 시비 옆에서 가족사진을 찍는 것으로 끝냈다.

그동안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증조부의 출생연도를 꼽아보았고 이번 성묘길에 동행한 손자들의 출생연도와 맞춰 보니 대략 140~150년의 차이가 났다.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출현한 사회학이라는 근대 학문의 세례를 받은 나는 근대에 기대를 걸며 새로운 세상에 눈떴던 윗세대와 근대 문명의 모든 문제를 안고 근대 끝자락에 서 있는 아랫세대를 거칠게 넘나들며 무거운 질문과 조우했다. 해방되기 2년 전 세상을 뜬 증조부는 당신의 자녀들과 손자들이 좌우대립이 치열했던 해방공간과 육이오를 거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그 폭력적 시대를 ‘다행스럽게도’ 마주치지는 않았다.

‘폭력적’ 근대에 대한 유감과 포스트 근대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질문에 다가선 것은 어쩌면 이번 성묘길에 어린 두 손자와 함께해서였을 것이다. 코로나가 덮치기 직전 출생한 두 살 반이 안 된 손자는 유난히 하늘의 별 보기와 달 보기를 좋아한다. 이 아이는 어린이집을 마스크 쓰는 일로 시작했는데 아직도 말이 더디다. 또래들과 어울리다 보면 말이 늘 것으로 기대했는데 6개월이 지나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어린이집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 입 모양을 볼 수 없어서다. 달을 좋아하는 이 아이는 하늘에서 반달을 보았을 때는 손을 높이 치켜들고 반으로 싹 가르는 시늉을 했다. 초승달 때는 두 손을 합쳐 귀에 대고 얼굴을 기웃하며 눈을 살긋이 감고 자는 표정을 지었다. 말보다는 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 세대가 어떤 이름을 얻게 될지 ‘사회학자 할머니’의 빈곤한 상상력은 진도를 내기 힘들다. 이 아이는 점점 별이나 달보다는 플라스틱 장난감 로봇의 이름에 익숙해지고 있다. 중학교 3학년 큰손자는 게스트 하우스에 머무는 동안 도쿄올림픽을 보는 어른들의 시간을 피해 밤 12시에 거실로 내려와 새벽 3시까지 수학 문제를 푸느라 출발하는 날 늦잠에 빠졌다. “중3이 공부할 게 그렇게 많으냐”고 신기해하면서 물으니 웃기만 했다. 빅데이터에 관심이 많아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할 생각이라고 말해서 왜 빅데이터에 관심이 있는지 그리고 빅데이터와 수학이 무슨 관계인지 물었을 때 나온 단어들은 인공지능(AI), 알고리즘, 새로운 언어로 글쓰기 등등 내가 따라가기에 벅찬 개념의 연속이었다. 증조 외할머니 반찬을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 한 이 손자는 상석 앞에서 가장 섧게 울음을 터뜨렸다. 큰손자의 등을 토닥거리던 나는 위로의 말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영화 <미나리>에서 순자(윤여정) 역의 할머니도 아니고 방학 때마다 외가에 가면 “워따 내 강아지들 오는가” 하면서 버선발로 토방을 내려오던 나의 외할머니와도 거리가 먼 ‘사회학자 할머니’는 스스로 어색해하며 등을 두드리던 손을 내렸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한 국제 보고서가 “지구 평균 온도가 산업화 이전보다 1.5도 높아지는 시기를 2021~2040년 사이로 제시했다”는 기사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자들의 나이를 꼽아보고 있었다.

성묘길에서도 내려놓지 못했던 우리 시대에 대한 무거운 질문은 서울에 돌아왔을 때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서울에 돌아온 날 후배가 간토(관동) 대지진 조선인 대학살 진상규명 촉구 1인시위에 나설 수 있는 날을 물어왔다. 대선배 언론인 임재경 선생께서 노구를 끌고 나오시면서 청을 보내셨다. 일정이 안 맞아 나서지는 못하면서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지금 우리는 그때로부터 한 발짝이라도 나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회의가 몰려왔다.

며칠 뒤에는 남편한테 주아프가니스탄 대사관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전화가 와서 함께 당황했다. 남편은 10년 전쯤 코이카 프로젝트로 아프가니스탄에 의료보험을 도입할 수 있도록 시범사업을 도우러 간 적이 있는데 통역 겸 어시스턴트로 함께 일한 파트너의 이름과 일한 기간을 확인해 달라는 전화였다. 곧이어 미국의 아프간 철수가 숨가쁘게 진행되었고 우리는 ‘아프간 특별기여자’를 선심 쓰듯 맞아들였다. 그러면 된 것일까? 새로운 밀레니얼은 100년 전 우리 선대가 맞서야 했던 제국주의 격동기와 다를 수 있을까? 어떤 평화를 후대에 물려줄 수 있을지 자문하며 칼럼을 마친다. 지난 4년간 나의 시간은 8주 만에 닥치는 칼럼의 시간으로 자주 환산되었다. 일상의 텍스트 읽기로 시작한 글쓰기는 수시로 나와 칼럼과 시대를 묶었다. 지면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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