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쩍이 운다

한겨레 2021. 9. 16. 15:0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어떤 번역가는 잘 읽히는 번역을 의심한다.

어떤 소설가는 자기 글이 물 흐르듯 잘 쓰이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만화나 단절이 있지만, 보통은 영화처럼 그것이 없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반면 <소쩍이 운다> 는 흔히 그 단절을 드러낸다.

아마도 여성 주체의 문제는 박흥용의 꽤 오랜 관심사였을 텐데, <새벽날개> (2019)에서 강하게 꿈틀거리다 <소쩍이 운다> 에서 대문을 열고 나섰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크리틱]

[크리틱] 정영목|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어떤 번역가는 잘 읽히는 번역을 의심한다. 어떤 소설가는 자기 글이 물 흐르듯 잘 쓰이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만화가는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이는 착시를 일으키는 만화를 경계한다. 매주 수요일이면 늘 지난주보다 두배 감탄하며 보게 되는 박흥용의 웹툰 <소쩍이 운다>는 컴퓨터 화면(또는 휴대전화 화면)을 스크롤하는 마우스 휠(또는 엄지손가락)에 저항한다. 수많은 웹툰 경험을 통해 거의 자동화된 화면 스크롤 속도와 마우스 휠 굴림 속도 사이의 동기화가 어긋나는 것이다. 컷과 컷 사이에 단절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만화나 단절이 있지만, 보통은 영화처럼 그것이 없는 듯한 착시를 일으키는 반면 <소쩍이 운다>는 흔히 그 단절을 드러낸다. 이 만화는 그림을 늘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하듯.

사실 한장의 그림에 순간적으로 응축된 삶의 결정체가 마음에 들어와 서서히 녹아 풀어지는 경험은 한번 맛 들이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스크롤이 멈출 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때로는 그림 한장을 놓고 거기 담긴 순간의 발생에서부터 소멸에 이르는 과정까지 떠올릴 수도 있는데, 박흥용은 김홍도의 서당 그림을 자기 그림으로 가져와 그 시범을 보여준다(9~10화). 그는 김홍도의 장면 전후에 몇 컷을 배치하여 그 장면이 어떤 연속체 가운데 예술가가 포착한 한 순간임을 보여준다. 마치 자신의 컷 하나하나도 그렇게 마음에 녹여가며 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림으로 정지시킨 순간은 일반적 시간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소쩍이 운다>는 자유롭게 그 순간을 늘리거나 줄이며, 이를 위해 똑같은 장면을 반복한다든가, 반복하되 미세한 변화만 주거나 부분만 확대하거나 배경만 삭제하는 등 보통 만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방법, 동시에 만화가 아니면 상상하기 힘든 방법을 과감하게 들여온다. 이것이 지루한 중복으로 떨어지지 않는 것은 이 컷들이 서술자의 심리적 박자를 타고 계속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박흥용은 자유로운 주관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일인칭 시점을 애용한다.

그렇다. <소쩍이 운다>는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1996)으로부터 백년이 지나지 않은 현종 치세에 귀족의 딸 진경(珍景)이 일인칭 시점에서 박흥용의 그림을 빌려 당대 사회와 자연의 진경(眞景)을 기록한 잡록(雜錄)이다. 진경과 호위무사의 동행기라는 틀 속에 일급 스릴러와 로맨스가 채워져 있지만, 작품의 박자를 책임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진경의 잡록이다. 또 잡록이기에 여주와 남주의 놀라운 클로즈업 컷들에도 불구하고, 진경의 시야에 들어오는 모두가 김홍도의 등장인물들처럼 살아 있다. 심지어 자연과 집도 전경을 차고앉아 자신의 생명력을 드러내는데, 박흥용의 돌담과 풀을 보면 세상에 애니미즘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 일인칭 관점의 소유자는 여성이다. 아마도 여성 주체의 문제는 박흥용의 꽤 오랜 관심사였을 텐데, <새벽날개>(2019)에서 강하게 꿈틀거리다 <소쩍이 운다>에서 대문을 열고 나섰다. 이 17세기 여성 진경은 특별한 경험과 식견도 갖추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사적 필연성에 따른 복장도착 때문에 현대적인 젠더 문제를 넘보고 있는 느낌이다. 또 그 특수한 상황에서 옆의 남성 인간과 형성하는 관계의 본질을 묻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박흥용이 얼마나 열려 있는 젊은 작가(자칭 29살)인지 드러난다. 실제로 그의 웹툰 세 작품은 모두 청춘의 성장기다. 아마도 이런 젊음 덕분에 그는 디지털에 문리가 트이는 순간 웹툰의 세로 스크롤과 채색 만화의 이질성을 외려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전과는 다른 자유를 즐기며 오직 만화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고 새로운 만화 어법을 찾아 나온 것이 아닐까.

박흥용의 젊음도 <소쩍이 운다>도 현재 진행 중이다.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