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꽂이] 獨 예술·학문에 가려졌던 '나치의 실체'

박준호 기자 사진 제공=페이퍼로드 2021. 9. 16.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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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줄리아 보이드 지음, 페이퍼로드 펴냄
곳곳 영토·전쟁 야망 드러냈지만
당시 외국인 여행자·유학생 등
독일 변화에 둔감..되레 찬사도
일기·보도·편지 통해 시대 재조명
[서울경제]

낯선 곳을 여행하며 그간 영위했던 관습이나 사상, 삶의 모습과 전혀 다른 것들을 접했을 때의 문화적 충격은 때로 삶의 방향까지도 바꿔 놓는다. 이러한 여행의 경험을 담은 책은 이역만리의 문화를 소개하는 창구가 된다. 물론 그곳의 모든 것을 아는 양 늘어놓는 여행자들의 이야기가 그 이면을 잡아내지 못하는 수박 겉핥기에 머무는 경우도 많지만 말이다. 이는 오랜 기간 타지에서 생활한 이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독일 관광을 홍보하는 포스터. 1920'~30년대 당시 독일은 미국, 영국 등 주요 국가의 인기 여행지였다.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인 1920~1940년대에 독일을 다녀가거나 그 곳에서 살았던 유럽, 미국, 호주인들 중에도 그런 여행자들이 있었다. 학생부터 정치인, 음악가, 외교관, 학생, 공산주의자, 학자, 운동선수, 시인, 언론인, 파시스트, 예술가까지 매우 다양한 이들이 이 시기에 독일을 여행했다. 그 중에는 대중에게 알려진 저명인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히틀러가 세계를 전란으로 몰고 가기 직전의 독일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신간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의 저자 줄리아 보이드는 “1930년대 말에 들어서도 외국인 여행자가 독일에서 몇 주를 보내며 자동차에 펑크가 나는 일 이상으로 불쾌한 일을 겪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전한다. 후세의 시선에서 보면 히틀러와 그의 제국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 전쟁을 추진했고, 세계의 국가들은 이들의 교묘한 선동과 계획에 속았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나치의 선전은 곳곳에서 그 허점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영토 야욕과 전쟁 야망을 숨기지 않았으며, 서구 열강의 언론은 이를 경계하고 비판하는 기사를 연일 실었다.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독일이 히틀러의 집권 후 국가사회주의당(나치)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변화하던 모습을 알아채지 못했다. 세상은 독일의 변화에 둔감했고, 심지어 이에 영합하기도 했다.

베를린 올림픽 포스터.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은 고대 그리스 이후 그 어떤 나라도 독일만큼 진정한 올림픽 정신을 담지 못했다고 칭찬했다.

저자는 책에서 당시 독일을 여행했던 외국인들의 일기와 편지, 언론 보도와 외교 기록, 발간되지 않았던 책 등 각종 기록을 토대로 나치 독일 시대의 풍경을 재구성한다. 책에 등장하는 수십 명의 인물은 저마다의 시간과 공간에서 활동했지만, 책은 마치 이들이 함께 있었던 것처럼 생동감있게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다. 각각의 시선을 한데 모아 히틀러 시대의 독일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봤다.

책은 당시 외국인들이 독일 곳곳에 퍼졌던 제복과 깃발, ‘하일 히틀러’ 경례 등 나치 정권의 흔적을 어느 정도로 무시했는지 고스란히 드러낸다. 미국올림픽위원회 회장은 나치 독일의 선전장으로 평가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고대 그리스 이후 그 어떤 나라도 독일만큼 진정한 올림픽 정신을 담지 못했다”고 칭찬했다. 마이클 킹 목사는 독일에서 그 어떤 인종차별도 겪지 않았던 경험에 깊은 감명을 받아 자신과 아들의 이름을 독일 종교개혁가의 이름을 따 ‘마틴 루터 킹’으로 바꿨다.

독일 나치 깃발과 영국 국기가 함께 보이는 모습은 당시 양국의 심리적 거리가 매우 가까웠던 걸 보여준다.

당시 외국인들은 왜 이토록 독일에 열광했을까. 이상주의자들에게 당시 독일은 예술·학문 등 어떤 분야든 자신들의 이상이 만개할 조짐이 보이는 곳이었다. 각종 비용은 헐값이라 할 만큼 저렴했고, 소년소녀들은 매혹적이고 헌신적이었다. 자연 풍경은 아름답고,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온 문화·학술적 전통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영국인이나 미국인 할 것 없이 독일 여행이 줄을 이었고, 상류층 집안은 자제들을 독일로 유학 보내고자 했다. 1937년에만 독일을 여행한 미국인이 50만 명에 달했다.

저자는 어느 시대이든 사람들은 실제보다는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고 지적한다. 이를 부추긴 것은 절반은 유대인을 향한 혐오, 나머지 절반은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가 퍼지면서 전쟁의 우려가 커진 상황을 히틀러가 평정해주리란 기대 심리였다. 또한 국제사회가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를 몸서리치게 성찰한 2차대전 이전에 여행자의 눈으로 변화를 날카롭게 감지하기란 쉽지 않았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하지만 여행자들이 1938년 11월 독일 전역의 유대인 상점이 파괴되고 유대인 100명이 살해된 ‘수정의 밤’ 사건 뒤에도 변화를 몰랐다고 잡아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저자는 점잖은 여행자들 상당수가 본국으로 돌아와서 히틀러의 독일에 찬사를 보냈다는 사실이 가장 오싹했다고 돌아본다. 3만3,000원.

‘하일 히틀러’ 경례는 1930년대 독일에 광범하게 퍼졌지만 외국인들은 이 조짐을 무시했다.
박준호 기자 사진 제공=페이퍼로드 violato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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