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어질 노래..뮤지컬 '하데스타운' [리뷰]
[경향신문]
음유 시인 오르페우스가 리라 대신 일레트로닉 기타를 들었다. 뱀에 물려죽어 지하 세계로 내려갔다던 에우리디케는 신화와는 달리 냉철한 현실주의자. 앞이 안보이는 가난에도 밤낮으로 곡만 써대는 남편 오르페우스를 뒤로 한 채 생존을 위해 자기 발로 지하 세계로 향한다. 하데스가 지배하는 지하 세계는 자본주의적 탐욕과 착취가 극대화된 광산이다. 최근 한국 관객에게 첫 선을 보인 <하데스타운>은 그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그리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뮤지컬이다.
<하데스타운>은 올해 하반기 초연되는 대형 뮤지컬 중 최대 기대작으로 꼽혔다. 2019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최신작일 뿐더러, 같은 해 토니어워즈에서 뮤지컬 부문 15개 중 1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이중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한 8개 부문을 휩쓸었다. 브로드웨이 최대 화제작이 초연 후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한국에 상륙해 마침내 베일을 벗었다. 팬데믹으로 지난해 3월 이후 일제히 극장 문을 닫은 브로드웨이에서도 지난 2일 <하데스타운>을 시작으로 뮤지컬 무대가 다시 열려 서울과 뉴욕에서 이 작품이 동시에 공연 중이다.
막이 오르면 뉴올리언스 재즈가 울려 퍼지는 낡은 선술집이 눈 앞에 펼쳐진다. 시기와 배경이 특정되진 않지만 이곳은 대공황이 휩쓸고 지나가 추위와 가난만 남은 빈자들의 도시. 술집 웨이터이자 작곡가인 오르페우스는 가혹한 겨울을 멈추고 봄을 불러올 노래를 쓰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자신이 “뒤틀린 세상을 다시 치유할 노래”에 열중한 사이 아내가 사라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고, 에우리디케를 찾아 하데스의 지하 광산으로 향한다.
최근 대형 뮤지컬이 보여주는 화려한 테크닉의 무대 전환 장치 없이도, 이 공연은 뛰어난 연출과 효율적인 공간 활용으로 지상과 지하 세계를 자연스럽게 오간다. 특히 오르페우스가 하데스의 지하세계로 향하고 빠져나오는 길목의 연출이 눈에 띈다. 이 뮤지컬의 가장 유명한 넘버이자 아내를 찾아 지하로 가는 길을 그린 ‘Wait for Me(기다려줘)’는 흔들리는 조명 속에서 배우들이 선보이는 퍼포먼스가 압도적이다. 뒤돌아보지 않는 조건으로 다시 지상으로 향하는 장면은 암전 속 무대 바닥의 턴테이블과 조명을 활용해 오르페우스의 갈등과 고독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대사 없이 노래로만 진행되는 ‘성스루(sung-through)’ 뮤지컬이다. 재즈와 포크, 블루스를 뒤섞은 독특한 음악이 155분간 관객 귀를 사로잡는다. 무대 위에 상주한 7인조 밴드가 꽉 찬 사운드를 들려준다. 극의 안내자 역할인 헤르메스(최재림·강홍석), 오르페우스(조형균·박강현·시우민) 등 주·조연 배우들 뿐만 아니라 광산 노동자들을 연기하는 앙상블 배우들까지 역동적인 안무와 노래로 빼어난 합을 보여준다.
공연은 수없이 변주되어온 익숙하고 오래된 신화 속 이야기도 얼마든지 현재성을 가진 동시대의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음을 효과적으로 증명했다. ‘죽음의 신’ 하데스를 광산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로 재해석한 대목이 흥미롭다. 하데스가 지배하는 광산을 그린 넘버 ‘Why We Build The Wall(우리가 벽을 세우는 이유)’은 미국 초연 당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미국·멕시코 장벽 건설을 비튼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노래 자체는 트럼프 당선 전인 2010년 작곡됐다. 이 넘버의 가사는 이렇다. ‘우리는 왜 벽을 세우는가/ 자유롭기 위해서지 그것이 벽을 세우는 이유/ 저 장벽은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장벽이 적을 막아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그것이 벽을 세우는 이유/ 우리의 적은 누구지/ 가난이 우리 우리의 적이지 적을 막아내기 위하여.’
극작가이자 작곡가인 아나이스 미첼은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영감을 받은 포크 앨범 ‘하데스타운’을 2010년 발매했고, 이후 연출가 레이첼 챠브킨과 손을 잡고 뮤지컬로 만들었다. 챠브킨은 <하데스타운>이 연대와 유대감에 관한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그는 토니어워즈 수상 소감에서 “삶은 ‘팀 스포츠’와 같고, 지옥에서 나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며 “우리가 혼자라고 느낄 때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자, 파트너가 바로 뒤에 있을 때도 어둠 속을 혼자 걷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권력 구조의 통제 방식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이것이 쇼의 핵심이자, 내가 이번 시즌 브로드웨이의 유일한 여성 연출가가 아니길 바라는 이유”라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신화 속 이야기와 다르지 않은 ‘새드 엔딩’이지만 그럼에도 희망적인 결말이 여운을 남긴다. 극의 안내자, 헤르메스는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린 부르리라, 중요한 것은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것. 이번엔 다를지도 모른다고 믿으면서. 내 친구에게 배운 교훈이죠.” 그리고 다시 첫 장면, 노래는 계속된다.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내년 2월27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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