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세상을 펼쳐내는 도구, 펜과 종이

권예슬 2021. 9. 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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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한테 아이디어를 내고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도구는 펜과 종이일 것이다.

태블릿이나 스타일러스 펜이 아니라 구시대적인 펜과 노트 이야기라 진부한 소재가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대체될 수 없는 영역이 이 둘이 아닌가 싶다. 펜촉이 종이의 표면을 스칠때 나는 소리와 감촉은 어떤 대체품으로도 전달할 수 없는 감성적 요소와 만난다. 학습의 과정에서 중요한 요인은 정보를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데 있다. 아이디어나 정보를 요약하고 학습하는 데에는 읽거나 듣고 보는 행동이 유발되지만 내용을 소화하는 데에는 반복 행위, 즉 그리거나 쓰거나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본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디지털에 의한 단순한 인터페이스의 반복 운동으로는 아무래도 학습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펜을 쓸 때의 모든 감각적 경험치를 대체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취향에 맞는 적절한 무게와 표면을 가진 종이에 아끼는 펜으로 스케치를 한다고 상상하면 이보다 더 환상적인 경험은 없다. 필자는 필기구에 대한 집착이 있다. 어느 나라의 도시를 방문해도 문구점에 들러 다양한 펜과 노트를 구경한다. 유학할 당시 항상 날카롭게 다듬어진 6개의 노란색 연필과 조그만 스케치북으로 무장한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꺼내 생각을 정리했다. 기다리거나 교통체증이 있을때도 어김없이 조그만 스케치북과 펜을 꺼내 나만의 세계를 펼쳤다. 서툴지만 나만의 언어로 가득 찬 나만의 책을 만들어 나갔다. 들어가고 싶은 RCA를 방문했을 때에도 마음을 다지고자 학교 로고가 들어간 스케치북을 사서 결심했다. 런던에 있는 건축 회사에 입사했을 때 가장 매력 있게 다가왔던 것은 엔지니어링 페이퍼로 불리는 옐로 페이퍼를 비품으로 받았을 때다. 사수인 마틴이 경쾌하게 미색의 트레이싱지를 자르며 도면 위를 스케치할 때면 마음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몇 년전 그가 생각나서 더 이상 판매되지 않는 펜을 이베이를 검색한 끝에 구했다. 옛 생각도 나고 사고의 전환도 생겨 일석이조의 아이템이 아닌가 싶다. 이렇듯 우리가 쓰는 펜과 종이는 정의되어지고, 그려지는 캔버스의 포맷에 따라 사고도 다양해진다. 생각이 막히면 스케치하던 종이의 재질이나 규격 방향을 바꿔보면 새로운 각도로 사고가 떠오르기도 한다. 다양한 포맷의 종이는 촉각적인 세계로 유도하며, 색다른 경험치를 준다. 종이의 감촉과 펜촉 끝과 종이가 만날 때의 소리로 만들어지는 필기감은 또 다른 쾌감을 준다. 태블릿이나 핸드폰에서 벗어나 연필, 수성펜, 만년필, 아트라이너, 유성펜 등 다양한 필기감을 느껴보자. 자유로운 사고의 정리와 분석은 자유로운 형식에서 나오기 쉽다고 생각한다. 물리적인 수단에 의해 표현된 결과물은 더욱더 소중함을 가져온다. 20년 이상 모은 필자의 작은 스케치북과 그 안의 생각은 가치로 대체하기 힘들다. 지속적인 아이디어의 정리 방법을 통해 데이터를 요약하는 방법을 발전시켜왔다.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노트에 선을 그으며 시간을 보낼 때도 아이디어가 나오는 경우가 많다. 아날로그적인 데이터의 힘은 상상 이외로 크다. 무게중심과 자신한테 최적화된 펜촉을 가진 만년필이라도 있으면, 다양한 잉크를 섞어 자신만의 색상으로 글이나 스케치를 할 수 있다. 나만의 색으로 만드는 나만의 책은 기대 이상으로 여러분을 지적인 위치로 올려놓는다. 거기에 좋아하는 질감과 두께의 노트에 글이나 그림을 그린다면 더할 나위 없다.

디지털 기기가 넘쳐나는 지금,  자신만의 멋들어진 펜과 노트에 생각을 정리해보자. 뭔가 특별한 희열을 느낄 것이다. 머릿속 생각을 촉각적이고 물리적인 수단을 통해 표현하는 행동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희열이 아닌가 싶다. 중심이 잘 잡히고 본인에게 잘 맞는 펜은 심리적인 안정감을 준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나시 교수한테 다른 교수들이 존경을 표하는 수단으로 자신들의 소중한 만년필을 내려놓는 펜 세리머니 장면은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울컥할 만큼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그만큼 펜에 대한 잠재적인 의미는 크다. 어쩌면 지적인 인간에 본능을 실현하기 위한 툴이라 전쟁터에서 총이나 칼만큼 중요한 수단이 아닌가 싶다. 펜은 무기보다 강하다고 하지 않던가. 누구라도 기회가 된다면 자신만의 소중한 펜과 노트를 가지고, 자기만의 책을 만들기 시작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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