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전남도청 앞서 군인 친 장갑차, 계엄군 소속 맞다"

김용희 2021. 9. 16.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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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사건인데 왜 40년이 지나도록 논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처음 법정에 나섰습니다."

15일 광주고등법원에서 열린 <전두환 회고록> 손해배상 항소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11공수특전여단 63대대 9지역대 출신 이경남(65) 목사는 재판 전 <한겨레> 기자를 만나 "1980년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군인을 친 장갑차는 계엄군 소속이 맞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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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계엄군 출신 이경남 목사
15일 '전두환 회고록' 항소심 증언
'시민이 몰아 군인 치었다' 왜곡돼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11공수여단 출신 이경남 목사가 15일 <전두환 회고록> 손해배상 항소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전 5·18 사적지를 둘러보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단순한 사건인데 왜 40년이 지나도록 논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처음 법정에 나섰습니다.”

15일 광주고등법원에서 열린 <전두환 회고록> 손해배상 항소심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11공수특전여단 63대대 9지역대 출신 이경남(65) 목사는 재판 전 <한겨레> 기자를 만나 “1980년 5월21일 옛 전남도청 앞에서 군인을 친 장갑차는 계엄군 소속이 맞다”고 말했다.

계엄군의 옛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빌미가 된 ‘장갑차에 의한 계엄군 사망 사건’은 지난 40여년간 논란이 돼왔다. 신군부는 시민군이 장갑차를 몰아 계엄군을 치어 죽여 자위권(자기방어) 차원에서 발포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1995년 검찰 조사와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도 이 주장을 받아들였고 전두환씨도 자신의 회고록에서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전두환 회고록> 69곳이 왜곡됐다고 판단한 1심에서도 장갑차 사건에 대한 부분은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사고 현장에 있었던 이 목사는 계엄군 장갑차에 의해 동료가 숨진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고 한다. 이 목사는 “시민군이 차를 몰아 우리 쪽으로 돌진하니까 우리 쪽 장갑차가 급후진했고 미처 피하지 못한 권아무개 일병이 장갑차 무한궤도에 하반신이 깔렸고 그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며 “다들 혼란스러운 상황이어서 사고를 본 사람은 많지 않지만 내 기억은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 때 야당 의원 사무실에 연락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이 목사는 1999년 계간 잡지 <당대비평> 겨울호에 ‘20년 만의 고백―한 특전사 병사가 겪은 광주’라는 글을 실명 기고했다. 계엄군이 언론에 양심선언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5월24일 육군보병학교 교도대와 11공수여단의 오인사격 때 보병학교가 대전차 무기인 무반동총까지 동원했다는 사실도 이 기고문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이 목사는 “광주청문회 이후 5·18 진실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공안 정국이 이어지며 망설였다.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야 글을 썼다”고 밝혔다.

대전의 한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며 군사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활동을 했던 이 목사는 대학 4학년인 1979년 5월 입대해 특전사로 차출됐다. 1980년 5월20일 밤 9시께 광주 동구 학동에서 계엄군에게 구타당해 쓰러진 40대 시민을 들쳐업고 인근 교회에 데려다줬다. 이 목사는 결국 길을 잃고 다음날 새벽 5시께 부대에 복귀해야 했다. 그에겐 그때 중대장의 구타가 눈에 선하다. 이튿날 오전 50대 시민을 부축하기도 했다. 이번엔 상급자가 “아군이냐 적군이냐”며 대검으로 위협했다. 그는 광주를 진압하기 위해 투입된 신분임에도 명령을 따를 수만은 없었다. 이 목사는 “계엄군 대부분은 어렵게 살고 있다. 양심고백을 하고 싶어도 쉽지 않은 상황일 것”이라며 “나는 오히려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고 기록을 남길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도 든다”고 말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1980년 5월21일 광주광역시 동구 옛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광주시민이 맞서고 있다.옛 국군기무사령부 사진첩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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