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장원급제는 실력이 아니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2021. 9. 16.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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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하는 ‘공원춘효도’와 ‘평생도’의 소과응시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의 풍경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두 그림의 구도는 비슷하다. 곳곳에 커다란 양산이 펼쳐져 있고, 양산 아래마다 예닐곱 명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답안을 작성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각자 답안을 쓰는 게 아니라 하나의 답안을 공동으로 작성하고 있다. 김홍도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부정이 난무하는 과거제도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다. 김홍도의 그림은 사회 비판과 거리가 멀다. 당시는 그것이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박양한(1677~1746)의 <강나대필>에 따르면 조선 중기까지 응시자의 친척, 친구들이 함께 시험장에 들어가 힘을 합쳐 답안을 작성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과거시험은 계속 열리니까 이런 식으로 한 사람씩 밀어주어 차례로 합격을 노리는 것이다. 수많은 자료가 증언하는 사실이다. 부정행위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외려 친척 간 화목과 친구 간 우애를 증명하는 일화로 거론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이 관행은 점차 사라진 듯하다. 이 때문에 박양한은 이렇게 개탄했다. “요즘은 아름다운 풍속이 사라지고 부자형제조차 각자 답안지를 작성한다.” 지금은 부정행위이지만 당시는 ‘아름다운 풍속’이었다.

함께 답안을 작성하던 친척과 친구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대리시험 전문가다. 좋은 자리를 맡아주는 ‘선접’, 참고서를 짊어진 ‘책행담’, 응시자 대신 답안을 작성하는 ‘거벽’, 작성한 답안을 답안지에 옮겨 쓰는 ‘서수’, 심부름을 맡은 노비가 한 조가 되어 시험장에 들어갔다. 이 역시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그러니 조상이 과거에 합격했다고 자랑할 것 없다. 누군가 대신 써준 답안지로 합격했을지 모른다.

장원급제도 자랑할 게 못 된다. 특히 생원시와 진사시 장원은 실력과 무관하다. 장원은 집안 좋은 사람 차지다. 과거시험 답안지에는 응시자의 인적사항을 기재하는 곳이 있다. 답안을 제출할 때 이곳이 보이지 않게 접어서 풀로 붙인다. ‘봉미’라고 한다. 응시자의 신분을 감추어 부정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고안된 장치다. 그런데 순위를 결정할 때는 반드시 봉미를 뜯어본다. 집안 좋은 사람에게 장원의 영광을 주기 위해서다.

나름 이유가 있다. 원래 인사라는 것은 지원자의 능력과 자질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법이다. 실력은 좋은데 인성이 쓰레기인 사람을 뽑을 수는 없지 않은가. 당시로서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집안만 한 것이 없었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장원으로 뽑히면 시험관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게다가 장원은 합격자들의 동기회장 노릇도 해야 한다. 100명이나 되는 동기들이 평생 믿고 따르려면 집안 배경을 무시할 수 없다. 어쩌다 서자를 장원으로 뽑는 바람에 합격자들이 집단으로 들고 일어난 적도 있다.

1747년 영조 임금이 문제 삼을 때까지 이런 식의 장원 선발을 불공정하다고 지적한 사람은 없었다. 중인이나 서자처럼 신분에 하자가 있는 사람을 생원 3등, 진사 6등에 두는 ‘생삼진륙’이라는 괴상한 관습도 마찬가지였다. 장원과 생삼진륙의 실태를 파악한 영조는 진노한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신하들은 300년 전통의 아름다운 풍속이라 변명한다. 아름다운 풍속, 어디서 들어본 말이다.

지금이야 공동 답안 작성은 부정행위고, 합격자의 집안을 보고 순위를 정하면 차별이다. 하지만 당시는 그것이 공정이었다. 공정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끼리도 다를 수 있다.

수능 정시는 공정한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공정한가. 88%에게 지급하는 재난지원금은 공정한가. 처지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문제다. 모두가 동의하는 공정 따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 공정하다느니 불공정하다느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린다면, 그 의미는 ‘나에게 유리하다’와 ‘나에게 불리하다’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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