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오빠, 동생’까지 괴뢰 말투가 된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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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진을 보면서 이들은 어떤 죄를 지었기에 뒤떨어진 청년이 됐을까 상상해봤다. 강력범죄를 저질렀다면 ‘접견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나마 용서가 가능한 ‘범죄’의 범위에서 나름 짐작해봤다. 깡마른 청년들은 생활고 때문에 도둑질을 했을 것 같고, 키 큰 청년들은 주먹질하다 잡혔을 것 같다. 김정은과 사진 찍는 자리에서도 발을 쩍 벌리고 양옆 청년들과 팔짱을 낀 ‘배포 큰 청년’도 보였다. 피부도 하얗고 영양 상태도 좋은 이 청년은 무슨 죄를 지었을까. 혹 보지 말라는 영상물이나 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가 걸린 잘사는 집 자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김정은은 지난해 11월 ‘괴뢰 말투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지금까지 많은 청년들이 체포됐다. 벌써 1년 가까이 돼 가고 있는데 단속은 점점 심해진다. 게다가 계속 새로운 ‘괴뢰 말투’들이 지정돼 내려오는데, 그걸 다 외우고 실수하지 않는 것도 예삿일은 아닐 듯하다.
처음엔 한국 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가 괴뢰 말투로 지정됐다. 가령 연인 사이에 “오빠야, 자기야” 했다간 괴뢰 말투를 쓰는 범죄자가 되는 식이다. 그런데 청년절인 8월 28일에 새로 내려온 방침을 입수해 보니 더 기가 막혔다. 이런 대목도 있었다.
“괴뢰 문화의 졸렬성, 부패성을 똑바로 인식시키기 위한 사상교양 사업을 짜고들 것. 청년들 속에서 친인척 관계가 없는데도 ‘오빠’ ‘동생’이라는 괴뢰 말투를 쓰면서 불건전한 사상을 유포시키는 행위를 근절하도록 할 것.”
형제나 친인척이 아닌 관계에서 오빠, 동생이라고 부르면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연상이나 동갑이면 “철수 동지” “영희 동무” 이런 식으로 부르고, 나이가 어리면 이름을 부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에 한국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들어간 지 20년도 더 되는데, 어릴 때부터 그 영향을 받아 오빠, 동생 하며 큰 청년들은 하루아침에 저도 모르게 튀어나가는 호칭을 쉽게 바꾸긴 어려울 것이다.
오빠, 동생뿐만 아니라 방침에는 괴뢰 말투의 잔재를 완전히 쓸어버리기 위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표현들이 잔뜩 나열돼 있다. 이번에 새로 괴뢰 말투로 지정된 표현은 이런 것들이다.
‘파격적이다. 이례적이다. 특례적이다’는 말은 절대로 쓰지 말 것. ‘단언하건대, 강조하건대, 정세하에서, 조건하에서, 금후, 사회적 거리두기’ 등도 괴뢰 말투라 피해야 한다. 괴뢰 말투가 아니지만 피해야 할 단어도 지정돼 있다.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에 대하여 ‘회고’라는 말을 쓰지 말 것”이라 내려온 것으로 보아 앞으로 ‘회고 모임’, ‘회고 음악회’ 이런 행사는 열리지 않을 듯하다. ‘친인민적’ ‘친현실적’이란 말은 ‘망탕(마구)’ 쓰지 말아야 할 단어가 됐다.
방침을 보니 시대를 역행하는 탈레반이 떠올랐다. 앞으로 북한에서 오빠, 동생 하다가 걸리면 범법자가 되고, 불미스러운 과거를 가진 뒤떨어진 청년이 돼 잘해봤자 탄광과 건설장에 가야 한다.
‘조선의 오늘’은 김정은이 만난 청년들을 1998년에 제작된 영화 ‘줄기는 뿌리에서 자란다’의 주인공에 비교했다. 깡패 두목이던 청년이 조직원들을 데리고 탄광에 가서 열심히 일해 영웅이 된다는 영화다. 웃기는 일은 이 영화가 북한에서 상영 금지된 영화라는 것이다. 불법영상물 단속기관의 자료에는 이 영화가 ‘장성택 역적의 여독청산과 관련하여 회수해야 할 전자다매체 목록’과 ‘역적들과 그 관련자들의 낯짝이 비춰지는 영화’ 목록에 동시에 올라있다. 여주인공 김혜경이 장성택의 정부였다고 처형됐기 때문이다. 보면 범죄자로 몰려 잡혀가던 영화를 다시 언급하며 따라 배우라고 하니 노동당 선전선동부도 이 박자 저 박자 맞추다가 맛이 간 것 같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북한은 ‘괴뢰말 사전’을 만들어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는데, 한국은 저들과 함께 ‘겨레말 큰사전’을 만든다며 400억 원의 세금을 썼고, 지금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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