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고교학점제, 꼭 지금 해야 합니까

송현숙 논설위원 입력 2021. 9. 15.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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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또다시 정권 말 교육현장의 대공사가 시작됐다. 학교 현장에선 고교학점제발 태풍이 한바탕 몰아닥칠 기세다. 고교학점제 안착을 위한 ‘2022 교육과정 개편’이 올 하반기에 시작돼 연내에 교육과정 주요 사항 발표, 내년엔 개정 교육과정 고시, 2024년 2월 ‘2028 대입제도 개편안’ 발표 등이 이어진다. 한동안 얼마나 시끄러울지 한숨부터 나온다.

송현숙 논설위원

지난달 교육부의 ‘2025년 고교학점제 전면 적용을 위한 단계적 이행 계획’ 발표를 보면서도 한숨이 더해졌다. 단계적 이행이라지만, 고교학점제의 도입시기를 현재 중학교 2학년이 고교에 진학하는 2023년부터로 사실상 2년 앞당겼다. 불과 6개월 전인 지난 2월 ‘고교학점제 종합 추진계획’ 발표 때만 해도 “현 초6 학년생이 고교생이 되는 2025년 전면 적용”을 말했을 뿐 중1, 중2는 언급된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당사자들로선 “날벼락”이란 말이 나올 법하다. 더 당혹스러운 것은 이들 2개 학년은 달라지는 교육과정으로 고교학점제를 적용받으면서도 입시는 현행 체제로 치러야 한다는 점이다. 교육 엇박자다.

고교학점제는 문재인 정부의 1호 교육공약이다. 고교생들이 대학생처럼 본인의 희망과 적성에 따라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듣고 정해진 학점을 채우면 졸업하는 제도다. 획일화된 교육에서 벗어나 자기 주도적인 인재로 성장하는 것을 돕겠다는 취지에서 나왔다. 학생들의 교과선택권을 넘어 교원 양성구조와 학교체제 등을 종합적으로 개편해 교육현장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어넣을 정책으로 기대를 모았다. 문제는 실행이다.

고교학점제가 취지대로 운영되기 위해선 필수적인 선행 조건들이 있다. 우선 수시 위주의 대학 입시가 전제되어야 하고, 내신과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성취평가제(절대평가)로 변경돼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이 소질과 적성에 맞는 다양한 과목들을 선택할 수 있다. 현행 상대평가 체제에서는 서로 눈치 보며 성적에 유리한 과목을 택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과목 개설도 필수다. 이를 위해 교사 증원은 물론 한 교사가 다양한 과목을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휴식공간이나 교과교실 등 제반 시설도 갖춰져야 한다.

현실은 어떤가. 현 중2 학생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진 1년 반가량이 남았지만 준비된 것은 거의 없다. 정부 스스로 고교학점제를 추진하면서 고교학점제 도입의 걸림돌인 정시 확대를 결정하는 모순을 저질렀다. 교육 주체 모두 고교학점제와 엇박자인 대입제도 개편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평가체제 개편은 다음 정부로 넘겨진 상태다. 교원 수급도 현재로선 불확실하다. 교육부는 일단 시행부터 하고 충원하자는 식이다. 정부가 강한 의지나 명확한 신호를 주지 못하다 보니 정책 성공의 핵심동력인 교원들의 자발성도 시들해지고 있다. 고교학점제 연구·선도학교의 담당자들조차 10명 중 7명가량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답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고교학점제가 교육 양극화를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도 높다. 선택과목 개설 수준이 학교별, 지역별로 천차만별일 것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특정 학군 쏠림 현상이 나타나며 사교육 의존도 심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런 우려 속에서 고교학점제를 정권 말인 지금 꼭 추진해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을 하면, 정책 취지에 공감한다는 교육전문가 대부분이 대답을 머뭇거린다. 취지가 나쁜 정책은 거의 없다.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만 있을 뿐이다. 솔직히 현 정부의 실력을 못 믿겠다. 선의는 알지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중요한 제도라면 정권 말이 되기 전 전폭적인 지원과 촘촘한 실행계획을 세웠어야 한다. 각 교육주체들을 설득해 여론을 움직이고 예산을 확보했어야 한다. 선의만 있고 실패한 정책은 이제 사양하고 싶다.

어렴풋이 짐작하건대, 정권 말에 정책을 추진하면 담당자들로선 좋은 점이 많다. 아무 일도 안 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있고, 어쨌든 공약을 지켰다는 명분도 생긴다. 어차피 지금 진행되는 모든 일이 다음 정권의 과제다. 담당자들은 교체될 것이고, 책임은 떠넘기면 된다. 고통은 남은 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혼란이 뻔히 보이는 방침을 계속 밀어붙이는 것은 무능력을 넘어 무책임한 일이다. 몇 년 동안이나 준비하고서도 현장에서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면, ‘무늬만 고교학점제’를 할 바에는, 충분히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다. 그동안 뭘 했느냐는 비판을 받더라도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멈춤을 선언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다.

송현숙 논설위원 s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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