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가끔은 무계획도 괜찮다..걸을 때도 그렇다

글·사진 이명희 선임기자 2021. 9. 15.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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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 없이 나온 당신을 위한 '서울 산책 도우미'

[경향신문]

서울 종로구 청운동 인왕산로에 자리잡은 ‘더숲 초소책방’. 야외 덱에서 탁 트인 서울시내를 바라볼 수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북촌 가신다면…‘삼청파출소’ 정류장에서 꼭 내리고
빵 좋아하시면…‘안국 153’에서 시향 한번 해보시고
야경이 좋다면…‘초소책방’ 덱에 올라서 구경하시고

이번 추석도 ‘집콕 명절’이다. 코로나19 때문에 받은 ‘귀성 면제권’이 내심 반가운 이들도, 부모님이나 가족을 볼 수 없어 한없이 아쉬운 이들도 있을 터. 고향이나 친척을 방문하는 대신 집에서 가족과 보내야 하는 이번 추석, 모처럼 맞는 긴 연휴인데 집에만 있기엔 아쉽다. 그렇다고 시끌벅적 명절 기분을 낼 상황도 아니니 마땅히 갈 곳도 없다.

명절마다 재탕·삼탕 우려먹는 TV도 싫증나고 누워 있기도 지치는 어느 날,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구보씨처럼 서울의 거리를 어슬렁거려보면 어떨까. 고향이나 해외로 떠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 적막하기까지 했던 팬데믹 이전의 서울만큼은 아니더라도 명절연휴에 서울은 한산하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도 분다.

지난 12일, 구보씨의 동선을 가이드로 삼아 미리 ‘명절 산책’을 해봤다. 최대한 명절연휴와 같은 기분을 내기 위해 평일보다 한산한 휴일을 택했다. 소설 속 구보씨는 정오쯤 집을 나와 새벽 2시에 귀가했지만 코로나19 시대에 새벽 귀가는 어려우니 출발 시간을 당겼다. 구보의 하루는 한국판 ‘불룸스 데이’(소설 <율리시스>의 레오폴드 불룸이 더블린 시내를 배회한 하루 동안의 여정을 되밟는 문학행사)처럼 수많은 이들이 재현하고 있으니 굳이 그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구보도 목적지 없이 1930년대 경성의 거리를 배회했으니 말이다.

#오전 9:00

서울 북촌로 12길 ‘가회동 2층 전망대’ 창가에서 바라본 북촌한옥마을.

일요일 아침 집을 나섰다. 아이스커피를 담은 텀블러와 카메라, 책 한 권을 챙겼다. 딱히 정한 곳은 없다. 버스를 타고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하차. 일단 길을 건너서 먼저 온 종로 11번 마을버스에 올라탔다. 삼청공원까지 가는 버스엔 승객은 3명뿐이었다. 어디를 갈까. 궁리 끝에 날도 좋으니 멀리 갈 것 없이 북촌에 가보기로 했다. 창밖 풍경에 빠질 틈도 없이 버스가 멈춰선 곳은 어느새 종점. 정류장을 하나둘 거치면서 그나마 있던 승객들은 다 내리고 혼자였다. 기사는 북촌에 간다고 하니 “삼청파출소에서 내렸어야 한다”고 일러줬다. 그냥 자리에 앉아 있을까 망설이는데 아차, 기사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어서 빨리 내려’라고 하는 것 같았다. 안 내리고 있다 행여 면박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싶어서 주섬주섬 가방을 챙겨 내렸다. 버스로 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휴일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행인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거리엔 ‘폐업’ 표지를 내붙인 가게가 꽤 많았다. 가게들이 간판도 떼지 못한 채 텅텅 빈 모습은 왠지 서글펐다.

삼청파출소 인근에서 지도앱을 켰다. 삼청동에서 북촌으로 넘어가는 길을 놓치면 낭패다 싶었다. 지도를 보며 왔다 갔다 하다가 카페들 사이 북촌으로 오르는 길을 찾았다. 계단을 숨차게 오르니 삼청동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바로 앞에 북촌생활사박물관이 보였지만 지나쳤다. 여기서 언덕길을 오르면 북촌한옥마을로 연결된다. 길가에 앉아 집에서 가져온 커피를 마셨다. 주택 2층에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가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집에서 나온 지 한나절은 된 것 같았는데 11시가 채 안 됐다.

길 중간쯤 ‘코리아’라고 쓰인 목욕탕 굴뚝이 보였다. 여기서도 삼청동으로 내려갈 수 있다. 목욕탕은 <무한도전> 촬영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목욕탕은 손님이 줄어 문을 닫았고, 지금은 게스트하우스가 됐다. 길을 따라 쭉 내려가니 정독도서관 앞이다. 경기고가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기기 전 있던 곳이 지금의 정독도서관 자리이다.

도서관 왼쪽으로 가면 북촌으로 바로 갈 수 있지만 길을 건너 감고당길로 갔다. 인현왕후와 명성황후, 두 왕비가 지냈던 ‘감고당(感古堂)’이 있던 터가 있어 그렇게 부른다. 현재 감고당은 경기 여주로 이전됐다. 감고당길은 정독도서관에서 안국역까지 이어진 골목으로 주말에는 차 없는 거리로 운영된다. 초입에 지난 7월 설립된 서울공예박물관이 보였지만 들어가지는 않았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 빵집 ‘안국153’. 야채식빵이 인기 메뉴다.

가회동으로 가기 위해 안국역 쪽으로 향하다 초록색 건물의 빵집 ‘안국 153(一五三)’에 들렀다. 창문 가득 식빵이 진열돼 있는 데다 빵 굽는 냄새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빵 나오는 시간인지 직원들이 오븐에서 알맞게 익은 빵들을 연신 꺼내고 있었다. 잡곡 식빵을 하나 골랐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며 직원에게 물어보니 추석연휴에도 문을 연다고 했다. 2, 3층에는 좌석이 있다.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싶은 유혹을 누르고 바로 나왔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간 오전 산책은 여기서 끝낼 것 같았다.

헌법재판소를 지나 가회동으로 가는 길엔 나들이객들이 제법 보였다. 오전인데도 한 베이커리 카페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명품 삼청 떡볶이’ 집은 영업 준비가 한창이었다. 본격적인 북촌 탐험에 앞서 길가에 있는 가회동 성당으로 먼저 갔다. 가회동 성당은 마당, 화장실 등을 외부인에게 모두 공개한 열린 공간이다. 그중에서도 성당 옥상은 북촌 한옥마을을 내려다볼 수 있는 명당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일요일이라 주일 미사가 진행 중이었다. 아쉽게도 코로나19 방역 조치로 마당만 출입이 가능하고 옥상은 개방하지 않는다고 했다. 코로나19는 여러 군데서 발목을 잡는다. 이 시절이 어서 지나가길….

성당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북촌로 12길(가회동 11번지)이다. 이 일대는 북촌의 대표적인 촬영 명소이다. 가파른 골목길 양쪽엔 한옥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입구에 ‘가회동 2층 전망대’와 ‘디귿집’ 표지판이 보였다. 성당 옥상에 가지 못했으니 별수 없이 가회동 전망대로 갔다. 이곳은 일반인이 거주하는 가정집이다. 2층을 전망대로 꾸며놓고 방문객들에게 공개하고 있었다. 언젠가 갔던 ‘북촌전망대’와는 또 다른 사설 전망대다. 입장료는 음료를 포함해서 3000원이다. 창문 사이로 기와지붕들이 맞대고 있는 북촌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망대에서 나와 미로처럼 얽힌 골목을 걸었다. 한때 관광객이 밀려들었던 북촌은 코로나19 사태로 원래의 고즈넉한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 배가 고팠다. 안국역 인근 칼국숫집에서 부추전에 막걸리를 한잔 했다.

#오후 2:00

점심을 먹고 109번 버스를 타고 광화문에서 내렸다. 다시 원점이다. 다리도 아프고, 어딘가에서 잠시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챙겨 나온 책은 아직 꺼내보지도 못했다.

오후 2시, 구보씨는 끽다점 ‘낙랑파라’에서 친구를 만났다. 낙랑파라가 위치했던 곳은 지금의 서울시청 앞 더플라자 호텔 근처이다.

다음 목적지는 사직동. 종로9번 버스를 타고 경복궁역에서 내려 사직터널 방향으로 걸었다. 주변을 물색하다 커피를 마시러 들른 곳은 사직터널 옆 ‘사직커피’. 사직커피를 택한 이유는 작정하고 와야 할 만큼 후미진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녹차라떼에 에스프레소와 크림이 더해진 ‘고블린’이 이곳의 대표 메뉴라는데 커피를 주문했다. 자리를 잡고 <여행하는 마음> 책을 읽었다. 배도 부르고, 노곤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깨고 보니 한 20분은 잔 것 같았다.

#오후 4:00

서울 인왕산 자락길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야경.

사직커피에서 주택가로 올라오면 인왕산 등산로초입에 있는 ‘광화문 아트홀’이다. 오늘 산책은 인왕산 자락길을 걷는 걸로 마무리 짓기로 했다. 아트홀에서 사직근린공원(사직단) 쪽으로 가면 인왕산 자락길이 시작된다. 인왕산 숲을 끼고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다. 이곳에서 윤동주문학관까지 약 2.5㎞ 구간으로 걸어서 1시간30분가량 소요된다. 중간쯤 전망대가 있어 서울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석양을 구경하고 싶다면 일몰 시간을 체크해서 출발하면 좋다. 하지만 일몰을 제대로 보려면 인왕산 정상에 올라야 한다.

자락길은 경사가 완만해서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다. 수성계곡 갈림길, 전망대를 지나 얼마 안 있어 최종 목적지인 ‘초소책방’이 보였다. 책방은 지난해 11월 문을 열었다. 이곳은 1968년 북한군이 청와대에 기습하려 했던 ‘김신조 사건’ 이후 청와대 방호 목적으로 세웠던 경찰 초소를 리모델링한 북 카페이다. 책방보다는 카페에 더 가깝다고 하는 게 좋겠다. 아는 사람들만 찾는다는 한적한 장소라고 했는데, 서울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경치 덕분에 입소문이 난 모양이다. 넓은 공간인데도 웬만한 곳은 사람들이 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1층은 책방과 카페로 운영된다. 종로구민이라 음료 가격의 10%를 할인받았다. 2층 야외 자리는 전망덱으로 쓰고 있다. 2층에는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1층으로 내려와 해가 넘어가기를 기다렸다.

해가 완전히 넘어간 다음 불 밝힌 서울 시내는 아름다웠다. 야경을 카메라 대신 휴대폰 카메라로 담았다. 바위 위에서 찍으려고 하니 카메라까지 들고 올라가기가 좀 부담스러웠다. 휴대폰에 담긴 야경은 비현실적이어서 실제보다 더 낭만적이었다. 북카페는 연중무휴,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운영한다. 루프톱은 상시 개방한다.

#오후 8:00

책방을 나와 윤동주문학관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어둠이 내린 문학관 앞 정류장에서 하루를 헤아려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의 아름다움을 가만히 들여다본 시간이었다.

당신도 또 한 명의 구보씨가 되어 지금의 서울거리를 거닐어 보시길. 코스는 상관없다. 다른 하루가 될 것이다.

글·사진 이명희 선임기자 mins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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