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이런 데 돈 쓰냐"던 엄마의 진심 [내가 사랑한 한끼]

끼니로그 기자 2021. 9. 15.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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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내가 사랑한 한끼’는 음식, 밥상, 먹는 일에 관해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코너입니다.

20대의 엄마는 호텔리어였다. 지금도 결혼·출산한 여성의 경력단절은 해결되지 않은 사회문제인데, 1980년대는 오죽했을까. 엄마는 결혼 후 원래 일하던 곳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가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 싶다.

엄마는 호텔리어의 꿈은 접어야 했지만, 직장인의 고된 삶은 안타깝게도 멈출 수 없었다. ‘잠깐 하겠다’던 엄마의 벌이는 내가 학업을 마친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공장에서 보낸 시간이 호텔에서 일한 시간을 훌쩍 넘어갔다. 내 벌이가 시원찮다고는 생각하면서도 그게 부끄럽지는 않았는데, 엄마한테 ‘이제 일 그만 하시라’고 자신있게 말 못하는 순간이 오면 참 피하고 싶었다.

마카롱. 레이디경향 자료사진

엄마에게도 ‘공장에서 받아주질 않는’ 나이가 찾아왔다. 일터는 일용직 자리가 많은 병원이나 뷔페로 바뀌었다. 그 때 엄마는 마카롱을 처음 만났다. 뷔페에 진열돼 있던, 형형색색 강렬한 마카롱과의 조우, 그렇게 즐거운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들, 그 애들이나 먹는 걸 왜 사갖고 왔니.”라고 나에게 말한 걸 보면.

엄마의 타박은 ‘왜 나에게 마카롱을 사주지 않았느냐’는 게 아니었다. ‘왜 그 돈으로 마카롱을 샀느냐’는 것이었다. 엄마는 지금도 그렇지만 빵을 참 좋아한다. 크림빵이나 단팥빵처럼 강렬한 달콤함을 자랑하는 빵보다는 버터향 물씬 나는 크로와상이나 파슬리가 살짝 뿌려진 마늘 바게뜨, 계란물을 입혀 구워낸 뒤 황설탕을 솔솔 뿌려낸 프렌치 토스트… 엄마를 따라 나도 참 좋아했다. “너가 내 뱃속에 있었어서 그래.” 먹성 좋은 아들이 자신과 비슷한 입맛을 가졌다며 뿌듯해하던 엄마는 수십번이고 말했다. 그리고 가끔 그 호텔에서 일한 얘기가 뒤따랐다. 호텔에서의 경험 덕분에 이런 입맛을 갖게 됐다는 추억과 일을 더 하지 못한 아쉬움도 함께 했다.

그런데도 엄마 손에 마카롱을 쥐어드려야겠다고는 생각하질 못했다. 아몬드 분말을 넣어 구운 꼬끄의 고소함과 그 사이에 들어간 크림의 달콤함을 싫어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은데 말이다. 그 때 나는 마카롱을 여자친구 선물 정도로 생각했지, 가족들이 둘러 앉아 먹을 간식으로는 한 번도 고려해보질 못했다.

마카롱. 레이디경향 자료사진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파는, 아마 공장에서 대량생산해 만들었을 법한 마카롱이 봉지 안에 있었을 거다. 아마 그날따라 마카롱이 눈에 보여서 슬쩍 집었을 거다. 봉지를 며칠 냉장고에 두고서 열어보니 마카롱이 없어졌다. 엄마는 말했다. “앞으로 마카롱 좀 더 사 와라.” 어디 유명 맛집에서 사 온 것도 아닌데, ‘양산형’ 마카롱이 그렇게 맛있었냐고 후에 물었다. 엄마는 처음 먹은 마카롱이 ‘애들이나 먹는 것 같은 맛’ 이었다고 했다. 처음엔 뷔페에서 ‘싸구려 마카롱’을 진열해서 그랬던 건가 했는데, 이제야 ‘일터의 고단함 탓이 마카롱의 달콤함보다 더 강했던 게 아녔을까’ 생각이 든다.

엄마는 일터와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지난해 코로나19 확산이 한창인 상황에서도 병원에서 감염을 무릅쓰고 일했는데, 그만 무릎에 탈이 났다. 엄마는 ‘일이 뭐라고 그렇게 살았을까’라며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울먹였지만,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다. 집 밖으로 몇 발자국이라도 나가려면 목발을 짚어야 했을 때, 엄마의 마카롱 ‘주문’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여자친구가 백화점에서 산 마카롱 박스를 받아들고 엄마는 “뭐 이런 데 돈을 쓰냐”면서도 “이건 다 내거”라고 했다. 어느 말이 엄마의 진심이었는지는, 일을 하지 않아도 고단했던 표정이 풀어지는 걸 보고 짐작했다.

최근 엄마의 주문이 하나 더 늘었다. “‘노티드 도넛’ 좀 사와.” 일터가 아닌 안방에 머무는 엄마의 낙은 유튜브로 보는 먹방이다. 누가 노티드 도넛을 먹었는데 정말 맛있더라며 극찬을 하더란다. 평소 살갑게 대하지도 못하면서 먹을 것으로 점수 만회하려는 못된 아들놈이지만, 조만간 압구정엘 가려고 한다.

샛강육수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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