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부조리에 노조 뛰쳐 나왔다" 노조 출신들이 말하는 고별사

김영훈 입력 2021. 9. 1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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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 비리 알리려다 노조에서 쫓겨나
노조간부 눈치 보며 소득 일부 상납도
총무도 감사위원도 모두 간부 친인척
조합원들은 감사 결과 진상 알 길 없어
타워크레인 임대업체와 건설사를 대상으로 한 타워크레인 노조의 채용 강요 행위가 도를 넘고 있다는 지적이 높다. 노조는 조합원 채용을 거부당하면 사소한 안전 부주의를 빌미로 무더기 산안법 고발을 이어가고 대규모 집회를 열어 공사를 방해한다. 공사를 중단시킬 목적으로 타워크레인을 무단 점거하기도 한다. 사진은 서울의 한 아파트 현장에서 타워크레인이 멈춰 있는 모습. 홍인기 기자
민주노총으로 결집한 우리는 인간다운 삶과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노동조건의 확보, 노동기본권의 쟁취, 노동현장의 비민주적 요소 척결, 산업재해 추방과 남녀평등의 실현을 위해 가열차게 투쟁할 것이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창립선언문 일부
이에 우리는 이 같은 기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동조합 민주주의와 노동운동의 자주성의 바탕 위에 과거 운동사의 역사적 재조명을 통해 그 성과를 계승하고, 오류를 시정하면서 우리의 조직 역량을 확대, 강화하고 노동조직의 통일을 기하며, 자주적 민주노동운동의 고양을 통해, 어떠한 도전과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기치를 높이 들어 과감하게 전진해 나갈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창립선언문 일부

노동자의 버팀목으로 자리 잡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모두가 지향하는 핵심적 가치는 '자주 '평등' '민주'로 요약된다. 아웃소싱(외주화)에 따른 왜곡된 건설산업 구조 속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익보호뿐 아니라 다른 노동자의 삶도 증진되길 기대하며 노조에 가입했다.

하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던 탓일까. 노조에 몸 담았다가 이탈한 이들은 한결같이 조직 내 불평등과 부조리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치부 감추려고 내홍 덮기 급급한 노조

민주노총 건설노조 타워크레인분과(민노) 조합원이었던 원모(56)씨는 2017년 자신이 속한 지회 간부로부터 ‘타워 대기 순번을 앞당겨주겠다’며 매달 200만 원 상납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원씨는 당시 충북 제천에서 타워크레인 기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기 순번 면제를 해줄 필요가 없다’고 답했지만, 해당 간부는 '지회 차원에서 이미 합의된 사항이다’ ‘상부인 타워크레인분과에서도 알고 있다’며 재차 돈을 요구했다.

결국 매달 200만 원씩 4개월간 지회 간부의 통장으로 돈을 입금하던 원씨는 금품 상납이 자신이 속한 지회만의 비리라는 걸 알게 됐고, 이를 알리기 위해 민주노총 상부조직을 찾아갔다.

하지만 다음날 원씨의 고발사실을 알게 된 지회 간부들은 원씨를 즉각 제명했고, 누구도 징계를 받지 않은 채 사건은 유야무야 종결됐다. 원씨는 "조직의 부조리를 바로잡으려고 상부에 알린 사람은 잘라내고, 사건 은폐에 급급한 모습에 너무 큰 회의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경기 화성 소재 건설중기 회사 모습. 해당건설중기 회사는 지난해 8월엔 한국노총 산하 전국건설산업인노동조합 소속(왼쪽 사진)이었다가 현재는 간판이 사라지고 민주노총 방송차가 주차된 상태다.(오른쪽 사진) 이 건설중기 회사는 소속 차주들과 함께 단체로 노조를 바꾼 것으로 확인됐다. 왼쪽 사진=카카오지도 캡쳐. 오른쪽 사진 화성=김영훈 기자

왜곡된 고용구조가 불평등 비민주성 유발

1990년대까지만 해도 건설사들은 타워크레인과 굴착기(포클레인), 덤프트럭 등 건설현장에 투입되는 기사를 직고용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건설사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외주화를 단행하면서 건설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불안정한 고용시장에 내던져지게 됐다. 노조가 조합원들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왜곡된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노조가 이처럼 '직업 소개소'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의사결정 권한을 가진 노조 간부들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졌지만, 동시에 조직 내 불평등과 비민주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함께 터져 나왔다. 하지만 조합원들이 조직 내 문제를 제기해도 수뇌부에선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는 게 당시 사건을 바라보던 조합원들의 설명이다. 민주노총 간부 출신의 정모(61)씨는 과거 조직 내 금품수수 비리 의혹을 제기했지만 진상조사도 제대로 안 하는 모습에 실망을 느꼈다. 정씨는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간부들의 전횡 때문에 노조 전체가 욕을 먹는 것을 보면 답답할 뿐"이라고 말했다.

한국노총 건설산업노조 건설기계분과에서 고위 간부로 있었던 최모(51)씨는 “노조 발전기금이란 명목으로 조합원과 간부 사이에 일감이 오갔고, 이런 돈은 노조에 돈을 벌어주는 자금줄로 쓰였다”고 고백했다. 발전기금이란 노조 간부가 조합원 장비를 현장에 투입해주는 대가로 노조 간부가 임대료 일부를 떼어가는 '사업 소개비'의 일종이다. 발전기금 수천만 원을 노조에 떼인 최씨는 결국 노조를 떠나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회계감사 결과도 간부끼리만 공유, 조합원들은 진상도 몰라

노조 내 불평등 구조가 만연하다 보니 조직 내 비리도 묻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국일보가 입수한 한국노총 전국건설산업노조 타워크레인분과(한노 타워분과) 경기남부 회계감사 보고서를 살펴보면, 조합원들에게 공개하는 ‘공개문건’과 간부들만 보는 ‘내부문건’이 따로 있었다.

내부문건에 적시된 감사의견에는 △사용처 입금계좌 아닌 개별 조합원 계좌로 현금 이체 △영수증 등 증빙서류 누락 다수 △장부 입금금액 산출방법 오류 △별도 회계감사 미실시 등 다수의 회계비리 정황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조합원들에게 공개한 감사보고서에는 ‘전체적으로 내용면으로 어느 누가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를 잘했다’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당시 감사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다가 노조를 떠난 김모(53)씨는 “외부에서 회계감사를 하는 게 아니라, 간부 친인척이 총무, 감사위원 등을 맡다 보니 서로의 치부를 묵인해주는 걸 당연시한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노동자 권익보호라는 노조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려면 조직 내 투명성과 민주성이 확보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권오성 성신여대 법학과 교수는 “각국의 노동조합법을 살펴보면 우리보다 높은 수준의 재정 투명성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며 “재무자료와 회계감사 결과 등을 외부에 상세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영훈 기자 huni@hankookilbo.com
윤현종 기자 belly@hankookilbo.com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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