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미술 거장 8人의 '그림 속살'을 엿보다

장재선 기자 2021. 9. 1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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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자 화백의 ‘1989-6 이브의 보리밭 89’(판화·왼쪽)와 ‘모필 크로키 1’(드로잉).
김영원 작가의 ‘Cosmic force D20- 10’.

■ ‘원로작가 드로잉&판화전’… 청작화랑서 내달5일까지

김흥수·서세옥 등 예술적 영감

여성화가 이숙자 작품도 눈길

‘세종대왕상 조각가’ 김영원은

역동적 氣 담은 연작 5점 선봬

섬세한 선·살아있는 입체감…

소묘 등으로 환상·해학 표현

글·사진 = 장재선 선임기자

김흥수(1919∼2014), 서세옥(1929∼2020), 박서보(90), 이우환(85).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미술사 거장들이다. 이들의 판화를 한자리서 만나는 기회가 생겼다. 서울 신사동 청작화랑이 다음 달 5일까지 여는 ‘원로작가 드로잉 & 판화전’이 그것이다. 여성화가로서 돌올한 박래현(1920∼1976)의 판화, 이숙자(79)의 드로잉 작품도 볼 수 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조각가 전뢰진(92)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을 만든 김영원(74)의 드로잉 작품도 이채롭다.

이번 전시는 거장들의 작품을 한꺼번에 살피며 구매를 타진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일반 수집가들로서는 수억 원대에 달하는 원화를 구입하는 게 여의치 않지만, 가격 부담이 훨씬 덜한 판화는 노려볼 만하기 때문이다. 근년에 박서보, 이우환 화백의 판화가 2000만∼3000만 원에 팔리고 있는데, 젊은 층 수집가들이 늘어나면서 그 인기가 더 높아지는 추세다.

흔히 그림의 속살이라고 불리는 드로잉 작품이 많이 나왔다는 점에서도 이번 전시는 이채롭다. 미술사를 풍요롭게 한 거장들이 예술적 영감을 소묘로 표현한 것들이어서 친근한 느낌을 준다.

거장들의 작품이 한곳에 모인 배경 이야기가 사뭇 흥미롭다. 서세옥의 ‘사람들’ 연작, 박서보의 ‘묘법’, 이우환 ‘조응’은 지난 2002년 한국판화미술진흥회가 주최한 ‘한국 현대미술판화 특집전’에 나왔던 작품들이다. 당시 진흥회는 이들의 그림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렘바갤러리에 의뢰해 판화로 제작했다. 렘바갤러리의 독창적인 믹소그라피아(Mixografia) 기법으로 제작돼 붓자국이 보일 정도로 생생하고 부조 형태의 입체감도 살아 있다. 당시 국내 유명 갤러리들이 판화를 진작시킨다는 의미로 몇 점씩 구입했고, 이번에 그 일부가 나온 것이다.

김흥수 화백의 ‘염(만다라)’ ‘백봉승무도’는 석판화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김 화백이 생전 제작한 것을 화랑 측이 유족과 협의해서 이번 전시에 내놓게 됐다. 박래현 화백의 ‘계절의 인상’은 동판화 에칭 작품이다. 한국화 거장인 김기창의 아내였던 박래현은 남편과 별도로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가꾼 화가로 최근 재조명되고 있다. 한국화가 이숙자는 보리밭과 여성 누드를 그린 그림으로 유명한데, 이번에 판화와 드로잉을 함께 볼 수 있다. ‘푸른 보리벌-냉이 꽃다지’에서는 풍성한 감성을, ‘모필 크로키’에서는 섬세한 선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조각가인 전뢰진이 90대의 나이에도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것이 경이로운데, 조각 밑그림이 된 드로잉 역시 예사롭지 않다. 고래 등에 올라탄 소년의 모습을 담은 ‘유영’, 소설가 구자명과 큐레이터 김정희 등이 집을 찾아온 날을 기념한 ‘수밀도 나무 아래에서’는 일상의 곤고함을 이기는 환상과 해학을 담고 있다. 구자명의 아버지 구상과 교우한 이중섭의 흔적이 느껴지기도 한다.

김영원의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세종대왕상뿐 아니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청동 조각품인 ‘그림자의 그림자’ 연작으로도 알려진 조각가다. 그의 평면 작업은 조각의 밑그림이 아니다. 스스로 ‘명상 드로잉’이라고 이름 붙인 하나의 장르다. 이번에 선보인 ‘코스믹 포스(Cosmic force)’ 연작 5점은 캔버스에 유화 물감을 바르고 그 위를 다른 색으로 덮은 뒤 그 앞에서 작가가 기공(氣功)을 하며 손으로 화면을 휘저어 아래쪽 물감이 드러나게 한 것들이다. 작가가 무아지경 속에서 만든 것이지만, 역동적인 형상들은 무언가를 외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전시장에서 만난 김 작가는 “1994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원형 흙 기둥을 손으로 긁어내는 기 퍼포먼스를 시작했는데, 서양미술인들이 독창성을 인정하더라”며 명상 드로잉의 출발점을 밝혔다. 심신 수양을 위해 기공 수련을 해 왔다는 작가는 지난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기가 이끄는 몸의 움직임으로 드로잉하는 평면 작업을 해 왔다. 그는 “몸과 마음이 우주 기운과 하나가 되는 순간을 담고 있는데, 기마 민족의 유전인자에 있는 역동성이 절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라며 “이것이 물질과 자본 중심의 세상에 대응하는 미래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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