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 [장르물 전성시대]

2021. 9. 15.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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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논리에 무릎 꿇은 언론 윤리
[주간경향]

최근 픽션에 등장하는 기자들 대부분은 언론의 순기능과 거리가 멀다. 부조리를 고발하는 감시자의 역할보다는 자기 잇속을 채우기 위해 거짓 기사는 물론 협박도 서슴지 않는 후안무치한 캐릭터나 거악에 협력하는 반동인물이 훨씬 더 익숙하다. 사회부 민완 기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이 아닌 이상 기자를 향한 이러한 편향된 캐릭터성은 잠깐 지나치고 말 유행으로 치부할 수 없을 만큼 고착화됐다. 정말로 정의로운 기자가 등장한들 쉽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어 창작자의 의도와는 무관히 입체적인 캐릭터로 보이는 현상 또한 이를 방증할 만하다. 그러나 ‘기레기’라는 멸칭만큼이나 가깝고도 편리한 캐릭터를 동원하는 사이, 언론의 본질과 시장에서의 경쟁력까지 고민해야 하는 언론인의 딜레마를 이야기하는 작품은 그만큼 드물어졌다.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 / (잇폰기 도루 지음)의 표지


잇폰기 도루의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는 그런 희소해진 주제를 앞세운 보기 드문 미스터리 소설이다. 작가의 필명이자 이 작품의 주인공이기도 한 사회부 중견 기자 잇폰기 도루는 다이요신문이 기획한 ‘범죄 보도·가족 시리즈’의 마지막 3부를 써서 호평받는다. 1부와 2부에서 각각 피해자와 가족, 가해자와 가족을 다루며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신문이 결말을 어떻게 맺을지 고민하던 와중에 잇폰기는 자신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그야말로 ‘기자의 통곡’이라는 부제에 걸맞은 기사를 써냈다. 이는 과거 자신의 특종 보도로 인해 약혼녀의 아버지가 구속된 사건으로, 누구도 그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음에도 그간 계속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직업윤리와 ‘내면의 죄’에 관한 내밀한 고해였다.

기사가 화제가 되면서 곧 그에게 한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의 발신인은 최근 발생한 무차별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그는 잇폰기에게 살인에 대한 정보를 담보로 신문을 통해 자신과 공개 토론할 것을 제안한다. 다이요신문은 살인범에게 지면을 할애하는 것이 옳은지 고민하다 결국 제안에 응하고, 잇폰기와 범인이 인간과 도덕, 본능과 범죄에 얽힌 철학적인 논쟁을 이어가면서 신문의 판매량은 치솟는다. 신문이 범인의 ‘극장형 범죄’를 조장하고 이용한다는 비판과도 직면하지만.

잇폰기는 연쇄살인범을 저지하고자 기사를 쓰는 동시에 그의 진짜 목적과 정체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이 작품의 또 다른 화자인 청년 요이치로의 모놀로그가 교차하면서 베일에 가려진 범인의 의도와 지면을 통해 과시하듯 전시한 사건의 내막이 뒤섞인다. 신문의 존재 가치와 윤리의식을 저울질하는 언론사의 모순이 단단한 외피를 이루는 가운데, 요이치로 아버지의 뜨거운 부정(父情)이 서서히 사건의 핵심을 이루며 내부를 채워나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범인의 목적과 정체를 유예하는 사이 주변부처럼 보이는 요이치로의 이야기가 잇폰기 기자의 과거사와 차츰 접점을 이루는 과정은 무척 놀랍다. 취재 윤리를 운운하면서도 결국 시장 논리에 흔들리는 언론의 위태한 상황은 뜻밖의 반전과 잇폰기와 범인 간의 수려한 논쟁까지 하나로 아우르며 그렇게 언론의 현실을 낱낱이 훑는다.

잇폰기 도루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2017년 제27회 아유카와 데쓰야 우수상을 수상했다. 당시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시인장의 살인〉이 워낙 센세이셔널했던 탓에 최고상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심사위원들은 예외적으로 우수상을 수여하며 힘을 실어줬다. ‘살인사건을 이용한 보도’라는 다소 자극적인 소재를 언론 내부의 자성으로 수렴한 미스터리의 첫발은 그만큼 묵직하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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