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현실 속 '송이들'을 향한 위로 [만화로 본 세상]

2021. 9. 15.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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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3층 건물 지하의 노래주점에는 반달 모양의 무대가 있었다. 술 취한 사람들이 밴드 음악에 맞춰 새벽 5시까지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쿵작쿵작 울리는 커다란 스피커 뒤로는 습기를 머금은 무겁고 어두운 벽이 버티고 있었다. 실은 거기 자그마한 문도 달려 있었지만, 흥에 겨운 붉은 얼굴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애초에 벽 따위를 찬찬히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비밀의 문을 열면 창도 없는 자그마한 창고가 나왔다. 계절이 세 번 바뀔 동안 그곳이 열세 살 송이의 방이었다. 저녁이 되기 전에 작은 방으로 들어가면, 손님들이 사라질 때까지 송이는 나오지 못했다. 그러니 그곳에 있는 것은 벽이 맞았다.

<반달>(김소희 지음)의 표지


송이의 삶에 닥친 비극은 지금은 사라진 연대보증이라는 잔혹한 제도 때문이다. 어느 날 아빠가 사라져버리고, 가난이 무엇인지 알아버린 송이는 또 다른 송이들의 삶에도 눈을 뜬다. 그 여름의 끝부터 한겨울의 시간이 〈반달〉에 담겼다. 서늘하고도 따뜻한 이 만화는 자전적 이야기다. 김소희 작가는 스물여섯 살에 서울문화사 공모전으로 데뷔해 3년 후 첫 단행본 〈고양이와 새〉를 출간했다. 그 뒤 어린이 책에 일러스트와 만화를 그리다가 15년 만에 다시 단행본을 펴냈다. 마흔셋에야 쓰게 된 열세 살의 이야기. 30년이라는 세월에서 국민학교는 초등학교로 바뀌었고 대놓고 ‘촌지’를 요구하던 선생들은 사라졌다. 그러나 가난한 아이들은 여전히 이곳에 있다. 작가는 급식비를 내지 못하거나 깔창생리대를 쓰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뉴스로 들을 때마다 ‘송이와 친구들’을 떠올렸다. 지금도 어디엔가 있을 그들을 위로할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처음 이야기를 구성하고도 책이 나오기까지 9년이 필요했다. 이것은 봉인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송이는 자신을 ‘도깨비’라 불렀다. 누군가의 눈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어야 해서다. 송이 주변의 사람들이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송이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송이에게 상처를 준 것은 가난보다 차별이었다. 인기 많은 오락부장 송이는 늘 자기 ‘진짜’ 모습을 들킬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았다. 그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가족도 그 이야기를 묻어버렸다. 이 어두운 이야기를 해도 되는가? 내 이야기를 사람들이 듣고 싶어할까? 수없이 되뇐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해준 수많은 존재의 응원에 힘입어 ‘나의 고통’은 ‘타인을 위로할 이야기’가 됐다.

현실의 날 선 조각을 감싸안아 우리의 생각을 일깨우는 이야기로 세상에 드러내는 건 예술가의 힘이다. 이것을 그저 회고담에 그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독자이자 사회의 몫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빈부격차가 커졌다는 진단이 들린 지 오래다. 교육 격차도 크게 벌어졌다. 취약한 삶은 더욱 팍팍해졌고, 기후위기는 그 격차를 더 심화할 것이라는 예측도 어렵지 않다. 표에 민감한 대선주자들은 ‘불평등 해소’를 시대정신으로 짚고 관련 공약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들은 벽에 달린 작은 문을 눈치챌 수 있는 사람들일까? 두텁고 단단한 벽 너머에 있을 창도 없는 작은 방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일까? 말하면 안 되는 이야기,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이들의 삶을 진심으로 주목하는 데서 정치가 출발하기를 바란다.

박희정 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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