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시스턴트-출구가 보이지 않는 희망 없는 삶 [시네프리뷰]

2021. 9. 15.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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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영화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한 ‘어시스턴트’는 사실 카메라가 냉정하게 관조하고 있는 제인의 삶이기도 하다.


제목 어시스턴트(The Assistant)
제작연도 2019
제작국 미국
상영시간 1시간 27분
장르 드라마
감독 키티 그린
출연 줄리아 가너, 오웬 홀란드, 욘 오르시니
개봉 2021년 9월 16일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주)이놀미디어


퇴근해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자정이 넘었다. e메일로 전달된 동영상 링크와 비번을 카톡으로 복사해 휴대폰을 들고 침대에 누웠다. 온라인 시사. 코로나19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장면이다.

영화는 제인이라는 사회초년생의 하루를 다뤘다. 한마디로 지옥도(地獄圖)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희망 없는 삶.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떠오른 장면이 있다. 토드 헤인즈 감독의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1995)의 마지막 장면. 스쿨버스를 탄 주위 친구들이 재잘거리는 가운데 홀로 쓸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주인공 소녀. 딱히 열린 결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멋대로 이런 상상을 했다. 이제는 커서 성인이 된 주인공이 회상하는 청소년 시절의 자신. 비록 그때는 미운 오리 새끼의 처지였지만 지금은 백조가 된 여인의 씁쓸한 과거의 기억을 묘사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희망은 있다(고 멋대로 해석해버렸다).

그런데 제인의 처지는 다르다. 사회초년생이지만 다 컸다. 그리고 길도 안 보인다. 원래 제인의 꿈은 할리우드에서 드문 여성영화 제작자가 되는 것이었다. 어쨌든 영화사 주변에 취직했으니 꿈이 실현되는 루틴을 걷는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생각이 파고들 여지는 없다. 암울하다.

왜 희망을 암시한다고 생각했을까

영화에 묘사된 제인의 하루는 ‘가장 먼저 출근해 가장 나중 퇴근하는’ 직장의 막내다. 새벽 별 보기 운동도 아니고, 꼭두새벽에 출근해 오전 8시에는 이미 바쁘게 일정이 돌아가고 있다. 그와 다른 두 남자 동료의 업무란 영화사 대표의 일정관리. 영화시장 동향 표를 복사하고 비행기표를 예약한다. 대표가 마실 단백질 셰이크를 타서 자리에 가져다 놓는 일만이 아니다. 자신의 카드를 남편이 정지시켜버렸다는 대표 사모님의 히스테리를 받아줘야 하며 회사에 따라와 짐승흉내를 내며 놀아주기를 바라는 대표의 아이들도 상대해야 한다. 산더미처럼 몰려오는 잔무를 처리하는 과정이 전체 1시간 27분짜리 장편영화의 절반 이상이다. 이래서야 과연 제대로 된 서사구조를 갖출 수 있는 것일까. 기승전결이 아니라 기승승승…만 1시간 넘게 계속되고 있는 상황.

그렇다고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실을 청소하던 제인은 바닥에 떨어진 귀걸이를 발견한다. 대표는 한 젊은 여성을 고용하는데, 이 여성에게는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호텔 숙박권이 주어진다. 그리고 대표는 업무시간 중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다. 제인은 직감적으로 대표의 불륜을 눈치채고 이와 관련한 상담을 하지만, 그 상담은 묵살된다.

그 인생에서 ‘출구 없음’은 영화의 시작 장면 구도와 동선에서도 암시돼 있다. 동영상의 플레이도 그렇고, 구식으로 영화의 릴 진행 방향을 따진다면 앞으로 나가는 것은 당연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다. 그러나 첫 장면, 캄캄한 새벽 그가 집에서 나와 차(우버일까)를 타는 장면에서 차의 진행 방향은 ‘←(오른쪽에서 왼쪽)’이다. 이야기의 방향과 역행이다. 차에서 내린 그가 문을 열고 자신의 직장을 들어가면 다시 그의 사무실은 왼쪽에 있다. 카메라 앵글의 중앙에서 역행해 왼쪽으로 퇴장. 그의 삶이 나락으로, 뒤로 가고 있다는 암시다. 의도적인 연출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동선이 암시하는 출구 없는 인생

사무실의 불을 끄고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직장동료들은 그에게 ‘영혼 없는 덕담’을 건넨다. “걱정하지 마. 여자애는 많은 걸 얻을 거야. 정말이야.” 그가 걱정하는 것은 대표의 내연녀로 의심을 하는 신참의 운명이 아니다. 영화제작자는커녕 하루의 일과가 버거운 자기 자신의 앞가림이다. 영화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한 ‘어시스턴트’는 영화의 대사에서 명시적으로는 그 신참 내연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지만, 사실 카메라가 냉정하게 관조하고 있는 제인의 삶이기도 하다. 보조자를 넘어선 그의 쓸모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조차 확신이 없는데도. 그래서 문득 궁금해진다. 1997년 시사회장에 앉아 있던 필자는 왜 토드 헤인즈 영화를 보며 ‘아마 지금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멋대로 해석했을까. 왜 이 영화에서는 그런 희망을 발견할 수 없을까. 나이 들어보니 세상을 좀더 알게 돼서? 아니면 그때보다 지금이 더 희망 없는 세상으로 변해서? 여전히 답을 못 찾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저물어가는 ‘실물’의 시대



리뷰를 쓰다 보면 본의 아니게 보도자료나 홍보 콘셉트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보도자료나 카피를 만드는 영화사·홍보사 직원에겐 나름의 애환이 있다. 느긋이 객석에 앉아 영화를 보거나 침대에 누워 베개를 베고 휴대폰으로 보고 팔자 좋게 한두마디 얹는 필자 같은 사람과 달리 영화사·홍보사 직원들에게 그 영화는 어쨌든 팔아야 하는 상품이다. 가급적 많은 사람이 극장이나 IPTV에서 클릭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적은 정보나 자료를 가지고도 뻥튀기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20년 넘게 이쪽 바닥에 출입한 가닥으로 말하자면 보도자료 관행도 많이 바뀌었다. 화보집 같은 걸 만들어 영화와 별도의 ‘굿즈’(그때는 이런 해괴한 직역투 말도 없었다)를 나눠주는 관행은 1990년대 중반께 사라졌다. 그다음 사라진 것은? 보도자료와 함께 엽서 크기로 출력돼 제공하던 자료사진이다. 통상 10장 내외의 인화된 스틸사진을 비닐포장해 제공하는 것이 관행이었고, 영화리뷰를 쓸 때는 그 사진들을 다시 스캔해 제공 이미지를 기사와 함께 첨부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자료사진이 사라진 건 2010년대 초반쯤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대부분 e메일에 첨부하거나 웹하드에서 다운받아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는 오프라인 보도자료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보낼 모양이다. 이제는 자료집 형태의 보도자료를 보는 것도 드물어졌다. 이 영화를 리뷰하며 기자가 받은 것은 비메오 비디오링크와 docx파일로 된 보도자료다(사진). 이제는 사라져가는 손에 잡히던 ‘실물의 시대’가 아련한 아쉬움을 남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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