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재정이라는 신화 [편집실에서]

2021. 9. 1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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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인구통계학에 따르면 여성 한명이 평생 2.1명의 아이를 낳아야 현 수준의 인구가 유지됩니다. 이를 대체출산율이라고 부릅니다. 한국 출산율이 2.1명 이하로 떨어진 것은 언제일까요. 2000년? 2005년? 놀랍게도 1983년입니다.

정부는 1983년 대체출산율이 깨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산아제한정책을 끝내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슬로건이 국민 머릿속에 각인된 탓이었습니다. 인구증가는 악이라는 신화는 우리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출산은 ‘거짓 꼴을 못 면하는’ 철없는 행위였습니다.

정부는 1993년 〈인구정책 30년사〉를 발간할 때도 600페이지 전부를 출산율 떨어뜨리는 것을 자랑으로 채웠습니다. 반전이 일어난 것은 1995년입니다. 이집트에서 열린 유엔 세계인구회의를 다녀온 자문단은 비로소 “출산율이 너무 빨리 떨어진다. 가족계획을 중단해야 할 것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6개월간 회의를 연 끝에 정부는 가족계획사업을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이 결정을 주도했던 서상목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금 생각해보면 1983년에 바로 저출산 대책을 세웠어도 늦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84명으로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으로 추락했습니다.

인구만큼이나 한국사회에 각인된 신화가 또 있습니다. ‘균형재정의 신화’입니다. 정부는 재정적자 운영을 해서는 안 되고 국가부채는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나랏빚’이라는 단어는 멀리는 국채보상운동이, 가깝게는 외환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을 떠올립니다.

한국사회는 저축은 선이고, 빚은 악이라는 개념이 오랫동안 지배해왔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가진 게 없던 시절 빚은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앉게 하는 무서운 놈이었습니다. 과거에는 금리도 높았습니다. 그때는 국가부채도 조심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은 이제 자산이 부채보다 많은 나라입니다. 2020년 국가재무제표상 자산은 2490조원으로 부채 1985조원보다 505조원이 더 많습니다. 게다가 국채금리는 1%대로 떨어졌고, 국채의 85%는 한국인이 사들이고 있습니다.

무작정 재정적자를 지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제는 적정부채에 대해 생각해볼 때라는 얘기입니다. 적정부채란 우리가 감당할 수 있으면서 최대의 효과를 낼 수 있는 부채를 말합니다. 재정을 잘 쓰면 쓰러져가는 개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사회를 더 안전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인구가 무조건 악이 아니었던 것처럼 빚도 무조건 악이 아닙니다. 경제정책은 불변의 원리가 아닙니다. 상황이 바뀌면 정책도 바뀌어야 합니다. 2015년 정부는 부동산 부양책을 내놨지만, 지금은 규제합니다. 인구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데 12년이 걸렸습니다. 재정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데는 얼마나 더 걸릴까요.

박병률 편집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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