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민주주의 수출 포기한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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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실크로드의 옛 도시 카불에선 탈레반이 쫓겨난 뒤에야 여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게 됐다.
"미국이 가면 안 돼요!" 열세 살 여자아이가 용감하게 말했다.
아프간 실패는 민주주의 이식 작업에 대한 미국의 근본적 회의를 반영하고 있다.
가치를 포기한 미국은 배후에서 탈레반과 정치적 거래를 본격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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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부정 美, 탈레반과 뒷거래 가능성
냉혹한 국제정치, 국익 동맹외교만 정답?
고대 실크로드의 옛 도시 카불에선 탈레반이 쫓겨난 뒤에야 여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게 됐다. 남학생도 소수만 다녀 연령대가 섞여 있었다. 교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대단했다. “갈 시간입니다, 의원님.” 자리를 뜰 때 누군가가 외쳤다. “미국이 가면 안 돼요!” 열세 살 여자아이가 용감하게 말했다. “읽는 법을 배워야 해요. 우리 어머니처럼 의사가 될 거예요.”
나는 다가가 아이를 안아주고 싶었다. “아니야 얘야, 미국은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적어도 2002년 1월 아프간을 둘러본 바이든 상원외교위원장은 이랬다. 회고록 ‘조 바이든, 지켜야 할 약속’에 일화가 전해진다. 그랬던 바이든은 지금 수많은 아프간인들을 취약한 상태로 남겨둔 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철군 과정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
물론 미군 철수는 작년 2월 트럼프 때 결정됐다. 역대 대통령들이 앓던 이를 뽑아낸 결단이었다. 트럼프는 맨해튼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를 다시 짓는 것이 아프간에서 싸우는 것보다 돈이 적게 든다고 생각했다. 탈레반과의 합의도 트럼프는 화려한 이벤트로 꾸미려 했던 듯하다. 존 볼턴의 회고록(‘그 일이 일어난 방’)을 보면 백악관 회의실에서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고 한다. “탈레반과 얘기하고 싶습니다. 워싱턴으로 오게 하세요.”
아프간 실패는 민주주의 이식 작업에 대한 미국의 근본적 회의를 반영하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가 아닌 지금, 대상국의 주권을 존중해야 하는 점령국이 내정간섭 금지라는 제약을 넘어서기 힘든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피점령국의 민심을 얻기 위해선 현지 주민이 중심이 된 독자정부를 띄워야 하는데 아프간 사례처럼 그 세력이 부정부패에 빠지면 통제하기 힘든 국면이 된다. 이른바 ‘주권존중의 역설’이다. 아프간 최대 은행의 부정과 횡령은 카르자이 전 대통령 일가까지 연루됐지만, 이에 대한 미국의 압박에 아프간 정부는 민족적 정서로 반발했다.
바이든은 기자회견에서 더 이상 다른 나라 재건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지금까지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 가치를 위해 싸워온 지도국가로서 행동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민주주의의 무게가 편의대로 적용된다면 보편적 가치가 될 수 없다. 미국 스스로 정체성을 부인한 것이다. 아프간 재건이 오직 미개한 대상국을 위한 일방적 자선사업이었을까. 함병춘의 1964년 포린 어페어즈 기고문이 연상된다. 한국인이 미국의 경제원조만 쳐다보는 거지근성이 있다고 조롱한 미군 장교를 꾸짖으며 쓴 글이었다. 한국에 원조를 하는 미국이 시혜를 베푸는 게 아니라 미국의 이익이기도 하다는 비판이었다. 한국이 중공-북한과 대치하면서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안보적 이익에 공헌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제 탈레반의 승리로 이슬람 테러집단은 새로운 도약을 앞두게 됐다. 가치를 포기한 미국은 배후에서 탈레반과 정치적 거래를 본격화할 것이다. 이슬람국가(IS) 같은 집단을 짓누르기 위해 외교적 승인이 절실한 탈레반과 한 배를 탈 가능성이 커졌다.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본질을 확인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가 바뀌진 않겠지만, 한국의 국익도 무조건적인 동맹외교에만 올인하는 게 정답일지 한번쯤 반문하게 되는 요즘이다.
박석원 국제부장 s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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