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조용기 목사

김태훈 논설위원 2021. 9. 15.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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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5월 18일, 6·25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서울 은평구 대조동의 변두리 가옥 마당에 허름한 천막이 쳐졌다. 젊은 목사 조용기와 장모 최자실 목사가 무릎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 밭일하다가 비를 피해 들어온 이웃도 함께했다. 여의도순복음 교회의 시작이었다. 순복음교회의 역사는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욥기 8장 7절 내용 그대로다. 목사와 신도를 합해 5명으로 문을 연 작은 교회가 1970년대 초 신도 1만명을 넘어서더니 1979년 10만명, 1984년 40만명, 1992년 70만명을 돌파했다. 2009년 조 목사 퇴임 직전엔 83만명에 달했다. 지금도 곳곳에 세운 지(支)성전을 제외하고 여의도 본당 신도만 50만명 넘는다.

일러스트=김도원 화백

▶순복음교회 신화의 중심에 ‘말씀이 좋은’ 조용기 목사가 있었다. 단지 성경 속 복음만 전한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던 그 시절 국민의 비원을 설교에 담았다. 그 배경엔 결핵에 걸리고 가난과도 싸웠던 조 목사의 어린 시절 경험이 깔려 있었다. 고향을 떠나 상경한 청년들은 “부지런히 일해서 잘살게 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조 목사 설교를 들으며 용기를 얻었다. 그들이 직장 잡고 내 집 마련하고 중산층으로 성장하는 사이, 순복음교회도 도약했다.

▶조용기 목사는 새마을운동에 자신의 건의도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2009년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농촌이 잘살아야 한다며 ‘새마음운동’을 건의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뜻은 좋은데 기독교 냄새가 난다고 해서 새마을운동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전언을 훗날 들었다고 했다. 사실이야 어떻든 조 목사도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의 전도사였다.

▶순복음교회는 서울 서대문을 거쳐 1973년 여의도로 이전했다. 허허벌판 모래밭에 터 잡고 ‘한강의 기적’을 지켜봤다. 삼성·현대·대우가 수출 역군으로 세계시장에 뛰어들 때, 조용기 목사는 비행기 타고 세계 선교에 나섰다. 브라질에서 행한 영어 설교엔 150만명이 모였다. 한국은 원조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거듭났고, 순복음교회는 동남아 국가의 가난한 심장병 어린이 수천 명의 수술을 돕는 교회가 됐다.

▶순복음교회의 역사는 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 우리가 이룬 기적과도 같은 압축 성장사를 닮았다. 조용기 목사는 그 기적에 뛰어들어 뜨겁게 삶을 불태웠던 한국 현대사의 인물이었다. 작은 교회에서 시작해 단일 교회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시킨 조용기 목사가 어제 오전 소천했다. 신앙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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