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도 추사도 한바탕 꿈이었더라 [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 선임기자 2021. 9. 1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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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서울 봉원사에 숨어 있는 근대사의 비밀들
서울 봉원사 대방(大房)에는 추사 김정희와 그 청나라 스승 옹방강의 글씨가 걸려 있다. 처음부터 이 절에 있었던 작품이 아니다. 대방은 흥선대원군 이하응 별장인 염리동 아소당을 이건해 만든 건물이다. 대원군 스승이 김정희였고, 그래서 아소당에 있던 작품들도 함께 절로 이사를 왔다. 대원군이 선친 묘를 이장하고 철거한 충남 예산 가야사 동종도 봉원사에 있다. 구한말 개화파 승려 이동인도 봉원사에 주석하며 갑신정변 주역들을 길러냈다. 근대사가 응축된 절, 봉원사다./박종인

* 유튜브 https://youtu.be/y3VSjjFix64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울 신촌 안산에 있는 봉원사 대웅전 현판 글씨는 원교 이광사가 썼다. 조선 후기 명필이다. 대웅전 옆 또 다른 법당 대방(大房) 대청에는 현판이 여럿 걸려 있는데, 주인공은 추사 김정희다. 김정희는 선배인 이광사 글씨를 졸렬하다고 혹평한 서예가였다. 그 현판이 걸려 있는 대방 원주인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원래 이름은 아소정이고 원래 있던 자리는 염리동이었다. 산으로 가는 계단 왼편 명부전(冥府殿) 현판은 정도전이 썼고, 주련은 이완용이 썼다. 계단 입구에는 이동인이라는 스님 기념비가 서 있다. 쇄국을 주도한 대원군과 동시대 인물 이동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개화(開化)를 주도한 각승(覺僧)이었다. 김옥균과 서재필은 이 절집에서 이동인을 만나 대오각성하고 혁명을 꿈꿨다. 개국 공신 정도전과 망국 관리 이완용, 시대를 뛰어넘은 앙숙 원교와 추사, 쇄국과 개화의 극을 걸어간 이하응과 이동인 그리고 젊은 혁명가들. 세기가 두 번 지난 오늘, 그들이 봉원사 대가람에 모여 있는 이유에 대하여.

[박종인의 땅의 歷史] 273. 서울 봉원사에 숨어 있는 근대사의 비밀들

‘내가 웃는다’, 대원군의 아소정

어느 날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시를 한 수 짓는다. 제목은 ‘아소당(我笑堂)’, ‘내가 웃는 집’. ‘내가 날 저버렸으니 그 책임 가볍지 않구나/나랏일 물러나 한적한 날 술잔만 기울인다/지난 일들 모두가 꿈이었구나/남은 삶 세속에 맡기자니 부끄럽기만 하다/(중략)/전생과 이생을 생각하며 내가 웃는다(我笑前生又此生·아소전생우차생)’(‘대동시선’ 권10, 장지연 편, 신문관, 1918)

1873년 겨울 친정을 선언한 아들 고종에 의해 하룻밤에 권력을 박탈당하고 쓴 시다. 이후 이하응은 그가 쓴 시 그대로 삶을 살았다. 1882년 왕십리 하급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 때 잠깐 궁궐로 복귀했지만 곧바로 청나라 군사에게 납치돼 일장춘몽으로 끝났다. 3년 뒤 대원군이 청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아들 고종은 대원군 존봉의절(大院君尊奉儀節)을 만들어 대원군이 사는 곳 대문에 차단봉을 설치하고 감시초소를 만들고 관리들 접견을 금지시켜 버렸다. 숨만 쉴 뿐, 권력 냄새조차 맡지 못 하도록 가둬버린 것이다.(1885년 9월 10일 ‘고종실록’)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에 의해 갑오정부 수장에 올랐지만, 이 또한 헛되이 끝났다.

그래서 대원군은 참 헛되이 살았다. 원래 살던 운현궁에 머물기도 했고 서울 염리동에 있는 별장에 살기도 했다. 별장은 지금 서울 염리동 서울디자인고교 자리에 있었다. 원래는 그가 미리 봐뒀던 묏자리였는데, 1870년 대원군은 그 자리에 별장을 짓고 일찌감치 묏자리 위에 살았다.

그 별장 이름이 아소정(我笑亭)이다. 대원군은 ‘자기 주검을 감출 가묘를 만들고 이를 감출 집을 지어 아소당이라 명명했고’(황현, ‘매천야록’ 1권 대원군의 가묘, 국사편찬위) 아들 고종은 집 주변 100보를 묏자리 경계로 삼았다.(1870년 8월 25일 ‘고종실록’) 1895년 갑오 개혁정부를 해산시킨 고종은 대원군을 아소당에 유폐시키고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면담을 금지해 아비를 산송장으로 만들어버렸다.(1895년 4월 23일 ‘고종실록’) 대한제국 건국 넉 달 뒤인 1898년 2월 대원군이 “주상을 보고 싶다”고 세 번 외치다 죽었다. 그가 묻힌 곳이 아소정 자리였으니, ‘전생이든 이생이든 웃음밖에 안 나온다’고 했던 상남자 대원군의 끝은 그러했다.

지금 봉원사 대방 건물이 그 아소정이다. 1966년 아소정 자리에 들어선 동도중고교가 마침 중창불사 중이던 봉원사에 아소정을 팔았다. 봉원사는 화재로 불탄 염불당 자리에 아소정을 이건해 대방(大房) 법당을 지었다.

당호 아소당은 위세가 천하를 떨게 하던 1870년에 지었다. 그때 그가 웃었던 웃음과 말년에 웃었던 웃음은 매우 다르지 않겠는가. 아소당이 언제 아소정으로 바뀌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충남 예산 남연군묘 자리에 있던 가야사 동종. 지금은 봉원사에 있다./박종인

대원군의 꿈, 가야사 동종

봉원사 대웅전 동쪽 문 옆에는 작은 동종이 앉아 있다. 이 또한 대원군과 악연이 깊다. 아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해 이하응은 부친 남연군 관을 상여에 싣고 자그마치 500리가 넘는 길을 내려갔다. 1845년 대원군은 “가야사 석탑 자리에 묏자리를 쓰면 2대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온다”는 지관 정만인 귀띔에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 묘를 충남 예산으로 옮겼다. 이듬해 정식으로 이장한 자리가 지금 남연군묘라 불리는 충남 예산 가야산 기슭 옛 가야사 터다.(‘남연군비’) 묏자리 주변에 산재한 절들을 총칭하던 가야사는 철거되고 말사 격인 묘암사에 있던 거대한 석탑 자리에 묘가 들어섰다. 과연 아들 명복(命福)과 손자 척(坧)이 황제가 되었지만 아비는 유폐돼 죽었고 나라는 사라졌다.

그 가야사에서 만든 작은 동종(銅鐘)이 봉원사 대웅전에 앉아 있다. 종에는 1760년 덕산, 예산, 회덕, 천안 같은 충청도 주민들이 추렴해 만들었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왜, 언제 이 종이 봉원사로 왔는지는 기록이 없다. 남연군묘 이장 사건을 제외하면 두 사찰은 함께할 인연이 희미하다. 옛 아소정과 봉원사 거리는 10리밖에 되지 않으니 이 또한 대원군이 남긴 흔적일 확률이 크다. 지금 남연군묘는 발굴 작업이 한창이니, 조만간 이 비밀 또한 풀리지 않을까.

대원군의 스승, 김정희

아들이 왕이 되기 전 대원군은 난(蘭)을 치며 살았다. 그가 그린 난초는 대원군 호를 따서 ‘석파란(石坡蘭)’이라 불린다. 난을 치는 그 기법과, 글을 쓰는 그 서법을 대원군은 추사한테 배웠다. 스승 김정희는 석파란 그림을 보고 이렇게 평했다. ‘보여주신 난폭(蘭幅)에 대해서 이 노부(老夫)도 손을 오므려야 하겠습니다. 압록강 동쪽에서 이만한 작품이 없습니다.’(김정희, 완당전집 2권 ‘석파에게 주는 다섯 번째 편지’) 글씨와 그림 스승이니, 당연히 아소정에는 추사 작품이 많았다.

청련시경 현판(추사 김정희)

그래서 1966년 봉원사가 아소정을 구입하고 보니 추사 글씨가 딸려와 있지 않은가. 횡재라. 옛 아소정인 봉원사 대방에는 추사 글씨 두 점과 청나라 학자 옹방강 글씨 한 점이 걸려 있다. 추사 것은 ‘靑蓮詩境(청련시경·푸른 연꽃과 같은 시의 경지)’와 ‘珊糊碧樹(산호벽수·산호 가지와 벽수 가지처럼 어울려 융성하라는 뜻)’, 그리고 ‘無量壽閣(무량수각)’은 김정희의 청나라 스승 옹방강(翁方綱) 글씨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풍운아도 가고 그 스승도 갔다. 인연은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남았다.

산호벽수 현판(추사 김정희)

대웅전 현판은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쓴 명필인데, 김정희(1786~1856)는 자기 전 시대 명필인 이광사 글씨를 “졸렬한 필법”이라고 악평했다. 원교와 추사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 주에 하기로 한다.

대웅전 현판(원교 이광사)

개화승 이동인, 그리고 갑신정변

‘하루는 김옥균이 여럿을 데리고 새 절로 놀러가자고 했다. 매우 공손하고 공부도 많이 한 스님을 만났다. ‘만국사기(萬國史記)’라는 책을 받아서 읽었다. 책을 읽고 나니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인민의 권리를 세워보자는 생각이 났단 말이지.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나서게 된 근본이야.’(김도태, ‘서재필박사자서전’, 을유문화사, 1972, p83~85)

서재필이 기억하는 ‘새 절’은 봉원사다. ‘공부도 많이 한 스님’은 봉원사에 있던 개화승 이동인(1849?~1881?)이다. 이동인은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을 경험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 이동인을 찾아서 김옥균과 박영효와 서재필과 그 무리들이 봉원사를 들락거렸다. 이동인은 이들을 ‘혁명당’이라고 불렀다.(이용희, ‘동인승의 행적上’, 국제문제연구1권1호, 서울대국제문제연구소, 1973) 이동인은 왕실 밀사로 1881년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파견에 큰 역할을 맡았는데, 이후 종적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젊은 엘리트들은 1884년 갑신정변으로 세상을 뒤집어놓았다. 서재필은 이렇게 회고했다. ‘이동인 스님이 우리를 인도해줬고, 새 절은 우리 개화파의 온상이라.’(위 같은 책)

사라진 이동인은 계단 옆 기념비로 인연을 잇고 있다. 한때 쇄국을 주장했던 권력가 흥선대원군과 개화로 변혁을 꿈꿨던 혁명가들 흔적이 절에 남아 있다. 명부전과 대웅전, 그리고 추사와 원교가 들려줄 이야기는 다음 주에 계속하기로 한다.

대원군 별장인 아소당 건물. 지금은 봉원사로 옮겨와 법당이 됐다. /박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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