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존재에게 추천할 영화, '군다'[동아광장/김금희]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2021. 9. 15. 03:0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다큐 영화 '군다'가 조명한 동물의 일상
미증유 팬데믹, 다른 생명체를 망각한 대가
다른 존재의 시선으로 지구를 성찰해야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영화 ‘ET’(1982년)에는 외계인 ET가 텔레비전을 보며 지구와 인간의 말을 속성으로 배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면 영화야말로 우리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하는 존재에게 확실히 그 정체를 인식시킬 수 있는 방법이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다. 최근 개최된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만난 빅토르 코사콥스키 감독의 ‘군다’(2020년)가 내게는 그런 영화였다. 지금 가장 먼 우주까지 나가 있는 지구의 물체는 미국에서 발사한 탐사선 보이저 1호로,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해도 20시간이 걸리는 아주 먼 거리다. 그 보이저 1호에는 지구를 설명하기 위해 인류의 다양한 언어와 동식물들의 소리를 녹음한 골든 레코드가 실려 있는데, 지금이라면 그 모든 의도를 이 감독의 영화들이 거뜬히 해내리라는 생각이 든다.

‘군다’는 암퇘지 군다가 새끼를 낳고 기르며 보낸 계절들에 관한 기록이다. 농장에는 군다 이외에도 닭과 소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사실 그들 모두 인류의 오랜 역사를 함께해 온 가축들이다. 가축이라고 하면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통제하고 관리하는 동물로 여기고 낮춰보거나 간과하기 쉽다. 동물 다큐멘터리조차 아프리카나 아마존 같은 이국적인 정취 속에 살아가는, 인간이 일상적으로 마주치기 어려운 동물들을 조명하기 마련이니까. 그런 대상들이 영화화되는 데는 대중의 호기심과 일종의 매체를 통한 정복 욕구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느새 매체를 통해 무언가를 ‘보면’ 그것을 다 안다거나 때론 소유했다는 감각에 사로잡힌다. 대상과 나 사이에 매개된 ‘매체’의 존재를 간과한 채 말이다.

하지만 인류의 문명이 농경 생활과 함께 번성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가축들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의 문명이 가능하게 한 가장 중요한 협력자다. 인간이 가장 첨단의 기술로 자랑하는 어떤 것도 역사의 시작점에 있는 이 가축들의 존재에 빚지지 않은 것은 없다.

‘군다’의 감독은 돼지, 닭, 소들에게 90분 동안 카메라를 온전히 맞춘다. 음악도 없고 내레이션도 없으며 인간도 등장하지 않는다. 가공을 최소화한 채 러시아의 한 농가로부터 전해지는 그 오래고 친숙한 소리와 장면들. 갓 세상에 나온 어린 생명들의 우렁찬 울음소리와, 새끼들을 끌고 들판으로 나가 뛰고 탐색하며 ‘사는 존재’로서의 자세를 가르치는 어미 군다의 늠름함. 그날의 사건에 따라, 감정에 따라 당연히 달라지는 군다의 다양한 표정과 몸짓들. 시원한 비가 내리는 어느 날, 군다는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헛간 문참에서 입가를 끌어올려 웃으며 고개를 들어 빗물을 받아 마신다. 이미 수천만 년 동안 계속되었을 그들의 ‘삶’, 하지만 공장식 축산이 끼어들면서 우리가 완전히 망각하게 되었던 생명들의 존엄한 삶이 경이롭게 펼쳐진다.

주인공인 암퇘지 군다뿐 아니라 닭과 소들 역시 이 영화에서는 매우 특별하게 조명된다. 방목된 닭들이 자기 키보다 높은 풀숲을 헤치며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전진하는 장면들에서는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도 계속되는 생명들의 특별한 모험심을 일깨운다. 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착각해 왔던 능력에 대한 반문처럼 느껴진다. 그 뒤 이어지는 소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나란히 엇갈려 서서 꼬리를 흔드는 것으로 상대의 얼굴에 붙은 파리들을 쫓아내주는 지혜와 협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군다’의 러닝 타임은 한 시간 반, 관객의 집중력을 붙들기 위해 많은 영화들이 더 화려하고 감각적인 장면들에 골몰하는 때에, 음악도 대사도 플롯도 없이 진행되는 ‘군다’는 어쩌면 대단히 실험적인 영화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실재하지도 않는 그 모든 가상의 것들에는 쉽게 시선을 빼앗기면서 왜 우리 세계에서 함께 살아 숨쉬는 존재들에 대해서는 망각과 회피를 선택하고 말까. 어쩌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미증유의 팬데믹은 그런 망각으로 앞당겨진 불행이 아닐까.

만약 외계의 우주인에게 ‘군다’를 보낸다면 인간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은 영화 내내 군다와 새끼들 주변을 불안하게 오가던 트럭 소리에 있다고, 방목한 가축들이 넘어가지 않도록 설치한 전기 울타리에 있다고, 영화의 마지막, 트랙터에서 내려 군다의 헛간으로 들어서던 발그림자에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비관이나 낙담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의 시선으로 지구를 성찰하고 이후의 삶을 선택하는 것, 그 또한 인간인 우리가 앞으로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