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의 삼시세끼, 제 손에서 만들어집니다

진천/최연진 기자 2021. 9. 15.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35년차 선수촌 영양사 한정숙씨, 도쿄서도 선수들 도시락 책임져

“연경이를 알게 된 지는 15년도 더 됐죠. 붙임성이 좋아서 꼭 먼저 말을 걸더라고요. 중학생 태환이를 처음 본 날도 기억나요. 감독님이 ‘저거 일 낼 놈’이라고 극찬을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죠. 미란이는 먹는 양이 적어서 체중을 늘리기 위해 야식을 계속 먹어야 했어요.”

국가대표 선수들의 식단을 책임지고 있는 한정숙 영양사가 진천선수촌 입구에서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올렸다. “선수촌은 ‘냉모밀 맛집’이지만 새로운 메뉴도 속속 개발하기 위해서 연일 회의에 몰두해요.” /신현종 기자

김연경(배구), 박태환(수영), 장미란(역도).... 대한민국을 빛낸 국가대표 선수들이다. 그러나 34년간 진해·태릉·진천·태백 등 선수촌을 누비며 선수들 식단을 도맡아온 영양사 한정숙(57)씨에겐 “밥 먹는 모습 하나하나 생생한 우리 아이들”이다. 한씨는 최근 도쿄올림픽 때에도 일본 도쿄 급식지원센터에 머물며 우리 선수들 도시락을 책임졌다. 진천선수촌에서 만난 그는 “삼시세끼 일반식과 체중 조절식, 간식과 특식을 챙기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지만 국가대표의 영양을 책임지고 있다는 데 상당한 자부심을 느낀다”며 웃었다.

영양학(영남대)을 전공한 그는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고향 진해에 선수촌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 영양사의 꿈을 키웠다. “막연하게 ‘저기서 선수들을 위해 일하고 싶다’ 생각한 게 1987년이었는데, 벌써 34년이 흘렀네요.” 켜켜이 쌓인 세월만큼 종목마다 모르는 선수가 없다. 지난 7월엔 ‘도시락 먹고 있니? 연경 먹고 힘내세요’라는 그의 카카오톡 메시지에 김연경이 ‘도시락 아주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먹고 힘낼게요’라고 답장한 게 공개돼 화제가 됐다.

선수촌 식당은 1년 내내 쉴 틈이 없다. “선수 수가 줄어드는 시기는 있어도 선수가 아예 없는 시기는 없어요.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준비하는 건 365일 똑같아요.” 올림픽처럼 큰 국제 경기가 있어 현지에 급식지원센터를 만들려면 복잡한 일은 두세 배로 는다. “런던올림픽 땐 서양식 주방의 화력이 너무 약해서 당황했어요. 우리는 음식을 센 불에 볶아야 하는데! 결국 중국식 화로를 구해다 썼어요. 일본은 전기가 110V잖아요? 대용량 밥솥을 못 써서 결국 전기 공사를 해야 했죠.” 힘든 과정을 견딜 수 있게 해준 건 선수들이 건네는 인사였다. “‘잘 먹었습니다. 운동 열심히 할게요’ 이 한마디에 하루 피로가 싹 녹아요. 내가 한 밥을 먹고 선수들이 나라를 대표해 뛰는구나, 책임감이 생기죠.”

30년 전 선수촌에선 개고기 요리를 해달라는 ‘황당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다. 선수들의 해외 경험이 적을 때라 외국 식당 적응을 위해서 스테이크 풀코스를 내놨더니 “이걸 먹고 어떻게 힘을 써요?” “김치 없이 어떻게 밥을 먹어요?” 하며 거세게 항의한 선수들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지만, 대신 ‘메뉴 개발’이 관건이다. “외식과 배달이 워낙 발달해 선수들 입맛이 다양해졌어요. 선수촌이 여기에 뒤처지면 안 되죠.”

선수촌의 최신 ‘시그니처’ 메뉴는 냉모밀이다. 이전엔 자장면과 짬뽕을 찾는 선수가 많았는데, 어느새 ‘냉모밀 맛집’으로 소문났다. 한씨는 “아이스하키 외국 용병 선수들이 라자냐를 먹고선 ‘집에서 먹던 거랑 똑같다’고 했을 때 솔직히 뿌듯했다”며 웃었다. 도쿄올림픽 히트 아이템은 ‘미숫가루’였다. 파우치 팩에 깔때기를 꽂고 수작업으로 가루를 넣었다. “노동력이 정말 많이 필요했는데, 선수들이 경기 전후나 늦은 시각 ‘편하게 잘 먹었다’고 하니 보람찼죠.”

그의 꿈은 자신의 재능을 은퇴 이후에도 활용하는 것이다. “교류 프로그램으로 선수촌에 왔던 제3 세계 선수들이 맛있게 식사하던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정년퇴직 후 영양 개선이 필요한 아프리카에 가서 봉사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