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민간인 학살하는데… 유엔은 1兆 지원하기로

뉴욕/정시행 특파원 2021. 9. 1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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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제네바 회의서 지원 논란… 美 3800억원, 獨 6900억원 원조
(카불 AP=연합뉴스)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재장악한 탈레반의 한 대원이 12일(현지 시각) 수도 카불의 한 은행 지점에서 예금 인출을 기다리는 시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이슬람 무장 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지 한 달이 되면서 유엔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가 이들을 합법 정권으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다. 탈레반 적대시 정책을 지속할 경우 국제사회가 짊어져야 하는 안보·경제적 부담과, 탈레반과 섣불리 손잡았다가 ‘아프간 인권에 등을 돌렸다’는 비난을 받는 정치적 부담 중 어느 쪽을 택할지 놓고 저울질이 본격화한 것이다.

탈레반을 현실적으로 인정, 경제 붕괴를 막으며 국제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은 유엔이다. 유엔의 안토니우 구테흐스 사무총장은 13일(현지 시각) 스위스 제네바에서 ‘아프간 인도주의적 상황에 대한 고위급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총 10억달러(약 1조1723억원)를 아프간에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아프간에서 철군한 미국은 국제개발처가 주관하는 기존의 아프간 지원 프로그램에 유엔 지원액 6400만달러(약 749억원)를 추가해 이번 회계연도에만 총 3억3000만달러(약 3861억원)를 지원키로 했다. 유럽연합 리더 격인 독일은 아프간과 이웃 국가에 총 5억유로(약 6918억원)를 지원하겠다고 했다.

원조금은 공식적으론 각종 구호 단체를 거쳐 보낸다는 입장이지만, 결국 ‘탈레반의 아프간’에 건네는 돈이다. 현재 미국 등은 탈레반을 불법 점령 세력으로 간주하고 각종 제재를 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칙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13일 제네바 유엔 유럽 본부에서 열린 아프간 인도주의 상황에 대한 고위급 회담에 참석해 기자회견을 열고 아프간 구호와 탈레반과의 대화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EPA 연합

유엔은 현재 아프간 내 구호 작업이 중단되면서 국민 절반에 해당하는 1800만명이 식량과 식수, 약품 부족을 겪고 있으며, 내년 아프간 빈곤율이 97%로 치솟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유니세프도 “올해 아프간 어린이 100만여 명이 영양실조로 사망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렇게 아프간에서 인도주의적 참상이 계속되거나 테러 집단이 발호할 경우, 아프간에서 서둘러 철군한 미 바이든 정부가 책임을 떠안게 된다. 인접한 유럽 국가들엔 아프간 난민이 쏟아져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챈틸리 AP=연합뉴스) 이슬람 무장 세력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한 피란민 가족들이 지난 8월 31일 미국 버지니아주 챈틸리 공항에 도착한 뒤 버스를 타려고 걸어가고 있다. 미국은 아프간 철군 및 대피 작전을 완료했지만, 미국인 200명가량과 수천 명으로 추정되는 현지 조력자들이 아직 대피하지 못했다. 미국은 탈레반 측에 이런 이들의 안전한 대피를 도울 경우 제재를 해제하고 원조를 재개하겠다는 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탈레반도 정상적 아프간 통치에 실패한다면 실각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크다. 미국과 협력해 합법적 정권으로 인정받는 것이 목표다. 이들이 지난달 아프간을 장악하면서 ‘개방적·포용적 정부’를 약속한 것이나, 아프간 최대 산업인 불법 마약 재배를 금지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이런 흐름을 읽은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연일 탈레반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자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지난 9일 AFP 인터뷰에서 “아프간 경제 붕괴를 막고 여성 인권을 보호하고 아프간이 테러 중심지가 되는 상황을 막으려면 (탈레반과) 국제사회와의 직접 대화가 필요하다”며 “탈레반이 정통성을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점이 우리의 유일한 지렛대”라고 했다.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이 없었던 그가 아프간 문제를 통해 리더십을 인정받으려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관측도 나온다.

아프간 매체 기자 두 명이 여성 시위 현장을 취재하다가 탈레반에 끌려가 구타당한 몸을 보여주고 있다. /트위터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바이든 정부가 미국에 협력한 아프간인의 대피를 도운 탈레반 간부들에 대한 제재 해제와 원조 재개, 향후 관계 정상화를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부통령 시절인 2011년 “탈레반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라며 탈레반을 다른 테러 단체와 달리 ‘미국과 어느 정도 협력이 가능한 상대’로 언급한 적도 있다.

문제는 아직 탈레반을 용인하고 믿을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탈레반은 “반대 세력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저항군 거점인 판지시르 계곡에서 민간인을 20명 이상 살해한 것으로 이날 알려졌다. 기자들이 여성 시위 현장을 취재하다가 탈레반에 채찍질당하기도 했다. 탈레반 대변인은 지난달 “이슬람의 틀 안에서 여성 취업과 교육을 허용하겠다”고 밝혔지만 또 다른 탈레반 고위 인사는 13일 “샤리아(이슬람 율법)는 남녀가 한 지붕 아래 모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탈레반은 내각에 여성을 참여시키겠다고 해놓고 강경파 남성으로만 채운 내각을 발표했다. 유엔의 한 관계자는 본지에 “탈레반은 일관성을 가진 단일 조직이 아니어서 예측 불가능하다”고 했다.

탈레반에 대한 모순적인 정책이 지적되자 미국 등은 ‘탈레반이 우리의 파트너가 될 자격이 있는지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주유엔 미국 대사는 “우리는 인도주의 기구의 운영권, 소수민족과 여성·소녀들의 권리를 옹호하겠다는 탈레반의 구두 및 서면 약속이 필요하다”며 “말로는 충분치 않다. 행동을 보겠다”고 했다. 하이코 마스 독일 외무장관도 “탈레반의 인권 존중 수준이 새 아프간 정부에 대한 우리의 향후 관여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제네바 로이터=연합뉴스) 미첼 바첼레트 유엔 인권최고대표가 13일(현지 시각) 스위스 제네바 소재 유엔사무국에서 개막한 제48차 인권이사회에 참석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슬람 무장 세력 탈레반이 약속과 달리 아프가니스탄의 과도 내각에 충성파만 임명했다며 비판했다.

이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가 당분간 탈레반을 합법 정권으로 인정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유엔이 아프간 원조를 결의한 13일 미첼 바첼레트 유엔 인권최고대표는 “탈레반 내각의 포용성 부족에 경악했다”면서 전 정부 출신에 대한 보복 살인, 시민단체와 언론인에 대한 폭력 등 아프간 인권 상황을 감시할 전담 기구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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