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직필]복지가 경제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21. 9. 1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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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국민의 세금을 복지지출에 쓰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건설·토목·기업에 쓰는 것은 개발과 투자. 이런 고정관념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재정을 관장하는 관료와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지식인, 서민, 노동자 모두 마찬가지다. 암울했던 독재와 험난한 경제개발의 시대를 지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편견이지만 아직도 21세기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취약계층, 노인, 청년을 위한 공공일자리를 만드는 재정지출은 퍼주기라고 폄하하지만 공항건설 같은 토목사업에 수십조원의 예산을 퍼붓거나 위기에 몰린 부실기업을 국고로 회생시키는 재정지출은 투자라고 본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전례 없는 팬데믹 속에서 수차례 이루어졌던 재난지원금으로 매번 소란스러운 논쟁과 복잡한 결정이 내려지는 것도 이런 편견과 무관치 않다. 서민과 노동자, 사회적 약자의 작은 범죄에는 살벌하게 엄중하지만 재벌의 배임·횡령이나 친·인척 일감몰아주기, 권력층이 연루된 경제범죄에는 관용적인 법조 엘리트 문화와 관행도 이런 편견과 무관치 않다. 노동자와 농민의 대표를 국회에 보내기는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워도 건설업자, 부동산 자산가, 돈 많고 배경 좋은 가문의 자녀들이 국회에 입성해 가문의 이익이 걸린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그런 정치 문화도 이런 편견과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다시 선거의 시절이 다가왔다. 국가의 미래를 놓고 후보들이 공약을 발표하고 상호 비판과 토론을 거쳐 투표로 ‘사회적 대타협’이 이루어지는 집단적 의사결정의 긴 과정의 초입이다. 국민 개개인은 똑똑한 정치인 혹은 정당보다 현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수천만의 국민이 편견이나 군중심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위치에서 독립적으로 판단한다면 투표는 그 어떤 현자보다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바로 집단지성의 과학이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합당한 이유 없이 편견과 선동 때문에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한 정책을 선택하고, 사회적 약자가 강자를 위해 선택하고, 서민이 재벌을 위해 투표하고, 차별받는 집단이 차별하는 집단의 정책을 지지하지 말라는 얘기다. 청년은 청년의 입장에서, 여성은 여성의 입장에서, 노인은 노인의 입장에서, 비정규직은 비정규직의 입장에서 가장 이롭다고 생각되는 정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경제학자라는 이유로 경제정책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질문하는 사람들은 정부가 특별한 재주를 부려 수출을 늘리고 경기를 살리고 기업가치와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건 기업이 할 일이고 내 대답은 이런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다. 주로 복지에 투자하고 시장의 유능한 관리자, 엄격한 심판관이 돼야 한다는 얘기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복지가 무슨 경제정책이냐는 반응을 접할 때도 있다.

복지야말로 경제의 시작과 끝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경제가 있는 것이고 또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경제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과거 모방·추격형 개발경제단계에는 복지를 희생하며 저축과 투자를 통해 경제를 살리는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더 이상 그렇게 성장하기 어려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고도의 기술, 전문성, 창의력이 필요한 단계에서 복지는 경제의 기초체력과 같다. 특히 한국경제의 가장 중요한 장점, 인적자본을 개발하고 고도화함에 있어서 복지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복지의 양극화가 극심해지면 다수의 국민들이 인적자본을 개발할 기회를 상실하게 되고 이것이 경제를 좌초하게 만드는 암초가 된다.

복지를 구성하는 세 가지 핵심은 돈, 건강, 교육이다. 지금 이 세 요소 모두 계층 간 격차가 심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기업규모 간, 제조업-서비스업 간, 정규직-비정규직 간 임금격차 모두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지나치게 높다. 자산 격차는 말할 것도 없다. 취약한 노동자들일수록 노동시간과 노동환경이 열악하고 이것이 건강악화를 불러온다. 재해사고는 이런 취약한 노동자들에게서 주로 발생한다. 교육은 계층상승의 기회를 제공하는 기능보다 계층을 고착화하는 기능이 더 강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복지와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방법도 있지만 정부의 감시·감독 기능과 공정한 시장 질서를 강화하는 방법도 있다. 전자만 강조하게 되면 시장의 격차를 오히려 가속화할 수 있고 재정의 지속 가능성의 문제를 일으킨다. 후자만 강조하게 되면 시장의 실패와 정부의 무기력으로 양극화는 더 심해진다. 양자 모두를 활용한 전략으로 양극화를 해소하고 복지를 강화하는 것이 경제발전을 지속하는 길이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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