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희의동행] 느림이 주는 위안

- 2021. 9. 14.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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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에 다녀왔다.

멀고도 먼 길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염려스러웠지만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다녀온 길이었다.

그 길이 초행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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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에 다녀왔다. 멀고도 먼 길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염려스러웠지만 조심하고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다녀온 길이었다. 그 길이 초행은 아니었다. 가끔 일 때문에 그곳을 지나야 했는데, 갈 때마다 나를 설레게 하던 길이었다. 세상에는 많고 많은 길이 있지만 그 길은 특별하면서도 애틋하다. 하긴 세상에 특별하지 않은 길이 어디 있을까. 길마다 각기 다른 내력과 풍경을 지니며 어딘가를 향해 뻗어있는 것을.

하동 가는 길이었다. 하동에 연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예전부터 하동이 좋은 것이 내 전생에 하동과 인연이 깊나 보다. 어쨌거나 그 하동 가는 길은 우리의 산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깨닫게 해준다. 다른 나라의 산하처럼 너무 웅장해 사람을 압도하지 않고 너무 거칠어 내치지도 않으며 너무 밋밋해 지루하지도 않다. 만만하게 보이면서도 안으로 들면 제법 웅숭깊은 것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그러면서도 다정하게 품어주고 아낌없이 내주는 것이 우리의 산하고 자연이다. 은어가 사는 강과, 그 강을 따라 산의 비탈을 깎아 만든 길은 운치가 뛰어나서 언제나 아름다운 길의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한데 그 하동 가는 길이 언제부턴가 조금씩 풍경이 바뀌었다. 강변을 따라 카페와 식당과 숙박업소가 들어서면서 조금씩 달라지는가 싶더니, 이태 전에는 아예 길을 따라 공사가 한창이었다. 여기저기 공사자재들이 어수선하게 부려져 있고, 길은 파헤쳐진 채 벌건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길에서 느낄 수 있던 적지 않은 시간의 결들과 고즈넉하면서도 운치 있던 풍경은 사라지고 대신 공사차량만 부지런히 오갔다. 내심 마뜩잖았다. 어떻게 변하려나,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그 길을 찾았다.

가도 가도 그 길이 나타나지 않았다. 밑동 굵은 나무로 터널을 이룬 그 길. 비밀스러운 다른 세상으로 이행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던 그 길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아주 짧은 구간에 예전의 모습이 남아 있었지만 길게 이어지던 그 길은 아니었다. 확장공사로 길이 넓혀진 것이다. 덕분에 차들은 막힘없이 씽씽 내달렸지만 밑동 굵은 나무가 양쪽으로 열주처럼 늘어서 있던 그 아름다운 풍경은 더는 볼 수 없었다. 터널로 하늘을 가리던 나무 대신 불을 밝힌 신호등이 허공에서 내달리는 차를 통제하고 있었다. 꼬리를 물고 달리던 차도 그 길을 정감 있게 만들어주었는데, 더는 그 풍경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길은 느리게 가도 좋은 길이었는데 아쉬웠다.

생각해보면 그 길만이 아니라 많은 아름다운 길이 사라져버렸다. 모든 길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넓은 길과 그 길이 주는 아찔한 속도감보다는 느리게 감으로써 얻는 위안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 길, 아름다운 길, 하동 가는 길, 이제 그 길은 내 기억 속에 존재하는 길이 됐다.

은미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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