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교회 이룬 목회자..'한국 교회 대형화의 상징' 지다

김종목 기자 2021. 9. 14.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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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자 조용기 원로목사 별세

[경향신문]

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자 조용기 목사는 삼중축복론 등으로 현세의 건강, 성공을 강조했다. 그의 양적·물질적 성장주의는 교회 안팎에서 비판을 받았다. 순복음교회의 성공은 세습, 권력 다툼 문제를 가져왔다. 신도들이 배임 등 혐의로 고발해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58년 불광동 천막교회로 시작
교인 70만명…기네스북 등재도
“국가 성장주의와 신성성 결합”
심장병 어린이 돕기 등 자선활동
세습·권력다툼·비리 문제 오명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가 14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조 목사가 입원 중이던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이날 오전 7시13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알렸다. 조 목사는 지난해 7월 뇌출혈로 쓰러진 뒤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조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자다.

조 목사는 1936년 2월14일 경남 울산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태어났다. 고교 2년 때 폐결핵으로 심하게 앓았다. 사망선고도 받았다. 한 여고생의 전도로 개신교에 접했다. 1956년 서울로 이주해 하나님의성회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했다. 조 목사는 최자실 목사와 함께 1958년 당시 서대문구 불광동(현재 은평구)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시초인 천막교회를 개척했다. 성도는 5명이었다. 이후 도시 빈민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1965년 최 목사의 딸인 김성혜씨(전 한세대 총장)와 결혼했다.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로 개칭했다가 1973년 여의도로 이전했다. 1979년 창립 20년 만에 교인 10만명을 기록했다. 1984년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조 목사는 불광동 시절 ‘좌석이 1만개가 되고 5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교회를 지으라’는 신의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조 목사는 주변 만류에도 당시 아무것도 없던 여의도에 새 교회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 목사로 일했다.

천막교회 때부터 ‘현실적 필요의 충족’을 목회 방향으로 잡았다. ‘삶의 문제 해결’이 신도 호응을 얻었다. 현세의 성공과 건강을 강조했다. 설교와 목회의 중심 주제는 ‘삼중축복’이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나아가서 육체가 건강해지는 ‘잘됨’”을 강조했다. 영혼이 잘되면 만사형통해 사업과 직장에서 성공하고, 육체의 질병도 치료되는 은총을 누린다고 했다.

조 목사는 한국 교회의 대형화·양적 성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93년 교인 70만명으로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 교회로 등재됐다. 조 목사는 교인 숫자 달성 목표를 1만명, 10만명에서 점차 70만명까지 높여 설정했다고 한다.

“국가 성장주의를 단순히 수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장을 신성성 차원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성장주의를 추동하고 실현할 수 있는 종교적 주체를 탄생시켰다”는 평(이정연 서울여대 초빙강의 교수)도 나왔다. 이정연 교수는 논문에서 “성장주의와 종교의 신성성이 결합되는 종교적 신념은 그의 구원론과 (삼중)축복론에서 잘 드러난다. 이 교회의 교리가 기반으로 하고 있는 신학은 한마디로 ‘신은 강하고 부유하다’고 규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했다. 성장주의는 이후 ‘물량적 성장주의’라는 비판을 교회 안팎에서 받았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장은 최근 경향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조용기의 성공 이면에는 1970~1980년대 개발독재사회의 시대정신과 부합하는 선교전략이 한몫하였다”고 말했다.

조 목사는 국가조찬기도회 등을 통해 한국 보수 정치권에도 영향을 끼쳤다. 여러 대선 주자들이 조 목사를 찾곤 했다. 반공주의와 성장주의를 결합한 ‘교회 권력’ ‘보수 개신교’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1988년엔 일간지 국민일보를 설립했다. 선한사람들 이사장, 아가페(기독교교도소) 대표고문, 사랑과행복나눔 이사장, 영산조용기자선재단 이사장 등을 맡아 자선활동을 꾸준히 벌였다. 소년소녀가장 돕기, 4704명의 심장병 어린이 무료시술을 진행했다. 평양 조용기심장전문병원 설립도 추진했다.

한국교회총연합은 이날 성명서를 내고 “세계 최대 교회를 이룬 능력의 목회자였다. 혼돈과 격변의 20세기 후반기에 복음으로 시대를 이끈 위대한 설교자이자 뛰어난 영성가로서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의 부흥을 이끌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확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했다. “산업화 시대, 실향민들이 서울로 집중되는 변화의 시기에 십자가 복음을 통한 삶의 변화와 긍정적 삶의 가치를 가르침으로써 모든 국민에게 희망으로 세상을 이길 용기를 갖게 했다”고도 했다.

교회의 양적 성장과 성공이 오명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한때 세습과 권력다툼, 비리 문제로 시끄러웠다. 가족들이 교회 돈으로 세운 기관과 학교에서 주요 보직을 맡았다. 2011년 5월 당시 조용기 원로목사가 국민일보 회장과 발행인, 국민문화재단 이사직 사표를 제출했다. 가족 구성원이 주요 직책에서 물러나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사태’는 정리되는 듯했다. 이후 교회 신도 400여명이 조 목사의 가족들이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야 한다며 서명운동을 벌였다. 교회 장로 30여명이 2011년 9월 조 목사 등을 배임 등 혐의로 고발했다. 이듬해 ‘교회 의혹 진상조사특별위원회’는 조 목사와 가족이 교회에 손해를 끼쳤다는 의혹이 일부 사실이고, 손해액은 355억원이라고 발표했다. 대법원은 2017년 조 목사와 장남 조희준 전 국민일보 회장에 대해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빈소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다니홀에 마련됐다. 장례예배인 ‘천국환송예배’는 18일 오전 8시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에서 한국교회장(葬)으로 열린다. 같은 날 오전 10시 오산리기도원 묘원에서 하관예배가 진행된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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