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의반도] 참 이상한 나라의 '지방'에서 살기

한겨레 2021. 9. 14.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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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의반도]한반의반도 비평
지난 6월9일 광주 동구 학동에서 발생한 철거 건물 붕괴사고의 현장. ‘한반의반도’ 11회는 전 5·18 단체 대표가 연루된 이 사고를 “폐쇄적 ‘인맥사슬’이 도시의 지반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여준 사건”이라고 이름 붙였다. 연합뉴스
‘한반의반도’는 바로 그 ‘중앙 아닌 곳’에 사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려는 기획이었다. 그것도 취재나 진단이 아니라 직접 발화의 형식으로. 내가 좋아하는 서양의 한 철학자는 몫이 없던 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태, 그래서 끊임없이 유지되는 ‘계쟁’의 상태, 그것을 일러 ‘민주주의’라고 했다. ‘한반의반도’ 전체 기사를 통독하면서, 나는 바로 그 계쟁을 기대했다.

한국은 참 이상한 나라다. 종종 문화예술위원회 지원사업 심사라도 할라치면, 광주 사는 나는 서울로 ‘올라간다’. 문화예술위는 인근 나주 혁신도시에 있어서 굳이 말하자면 ‘내려가야’ 하는데 말이다.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심사위원을 맡을 만한 인사들이 주로 수도권에 거주하고 있다니까. 직원들도 나주 서울 왕복하느라 고생이 많다니까. 지방분권제가 나주를 유령 도시로 만든 셈이다. 그런데 비단 그런 공무만이 아니다. 잡지 일도 서울 가서 하고, 원고도 주로 서울로 보낸다. 괜찮다는 공연도 전시도 서울에서 열리고, 전화도 이메일도 서울에서 많이 온다. 딸을 서울로 ‘유학’ 보냈는데, 이제 아들도 반드시 서울 가서 음악 하겠단다. 부와 문화와 일자리와 두뇌 태반이 모여 있는 곳, 거기가 ‘중앙’이니까.

‘중앙’이란 말을 곱씹어 본다. 언어학적 상식에 따르면 한 단어의 의미는 다른 단어와의 관계 속에서만 정해진다. 가령 ‘나’란 대명사는 ‘너, 그, 우리’라는 대명사와의 관계가 아니라면 아무 의미도 없다. ‘나’는 ‘너’나 ‘그’가 아님이다. 그렇다면 ‘중앙’이란 ‘중앙 아닌 것이 아님’이겠다. 그리고 그 중앙 아닌 것을 우리는 ‘지방’이나 ‘지역’이라고 부른다. 그러고 보니 지방이 중앙을 정의한다. 지방은 중앙에 대해 구성적이다.

궤변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매년 명절, 저 말은 저절로 증명된다. 텅 비는 중앙, ‘내려가는’ 차들, 북적거리는 지방. 그럴 때만, 지방은 그 이상한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한 가족’이 된다. 중앙 사는 사람들 태반이 실은 지방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런 사태의 기원이야 물론 도성이 한양이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의 ‘근대적 책임’은 박정희 정권 시절의 ‘개발독재’에 있다. 저곡가 정책에 따른 이촌향도 현상, 도시빈민의 폭증과 위성도시의 생성. 서울로 서울로, 그렇게 수십년이 지나는 동안 수도권의 밤은 불야성을 이뤘고, 시골의 밤은 인적이 끊겼다. 저녁 식사 시간만 지나면 불도 거의 꺼진 골목에 들고양이만 돌아다닌다.

한겨레에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다 보니 푸념이 길어졌다. ‘한반의반도’는 바로 그 ‘중앙 아닌 곳’에 사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주려는 기획이었다. 그것도 취재나 진단이 아니라 직접 발화의 형식으로. 내가 좋아하는 서양의 한 철학자는 몫이 없던 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태, 그래서 끊임없이 유지되는 ‘계쟁’의 상태, 그것을 일러 ‘민주주의’라고 했다. 한때 언론의 사명이었다던 바로 계쟁이 없다면 ‘치안’이 성공한 것일 테니까.

‘한반의반도’ 전체 기사를 통독하면서, 나는 바로 그 계쟁을 기대했다. 과연 대표적인 두 ‘지방’에 뿌리내리고 사는 신진 연구자들답게 다양한 문제의식들을 읽을 수 있었다. 20편의 기사를 읽고 키워드들을 뽑아봤다. 5·18과 당사자주의, 재개발과 젠트리피케이션, 대안공간, 학력차별과 지방대학 위기, 지역 차별과 여성 차별, 탈원전, 지역 출산·육아 정책, 지역 예술가 지원정책 등등. 실로 다양한 의제들이 부산과 광주에 기반을 둔 독립 연구집단 구성원들에 의해 공론장에 올랐다. 실은 도마에 올랐다.

매섭고 논쟁적인 목소리들이 많았다. 가령 “시티와 마을. 부산의 도시재생사업은 이 두 용어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며 증식하고 있다. 에코, 델타, 메가, 스마트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미래 시티와 예술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펼친 마을 구축이 부산 곳곳을 종횡무진한다”(18회)와 같은 발언은 굳이 부산만 아니라 현재 한국 사회 전체의 변화를 집약한다. “뜨거운 여름, 이 글자를 실어 나르는 전력조차 누군가의 생명을 싣고, 그 생명에 기대어 흘러간다”(14회)라는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방사능에 노출되기라도 한 것처럼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광주가 이런 ‘꼬라지’가 된 건 공교롭게도 5·18 때문이다. 아니, 5·18 이후 형성된 분위기가 광주의 생태계를 학연, 지연으로 통칭되는 ‘인맥사슬’의 구조 안으로 몰아갔다”(11회)라는 문장은 다소 거칠고 과장되어 있었으나 후련했고, 10회 기사의 ‘생각다방 산책극장’ 이야기는 겨울밤 겨우 남아 있는 불씨를 보는 것처럼 훈훈하고 안쓰러웠다.

흥미로웠던 것은, 부산 ‘젠더·어펙트 연구소’ 필자들이 주로 다룬 주제가 “시티와 마을”, 즉 재개발과 젠트리피케이션 문제였다면, ‘광주모더니즘’ 필진이 거의 예외 없이 다룬 주제는 5·18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부산을 잘 모른다. 그러나 부산이 인구도 건물도 초고령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해한다. 도시에도 생애사가 있는 법이고, 부산은 그 생애의 한 주기를 넘길 만큼 오래된 도시일 테니까. 그리고 ‘인구와 환경에 대해’, ‘통계와 효율성’을 근거로 작동하는, 이른바 ‘생명권력’이 그 호기를 놓칠 리 없다. ‘생명권력’이란 말이 낯설다면, 말을 바꿔도 좋겠다. 미셸 푸코라는 프랑스 철학자는 그것의 현대적 형태를 ‘신자유주의’라고 불렀다.

나는 평생을 광주에서 살았고 5·18에 대해 적지 않은 발언도 해 왔으니, 광주 얘기는 좀 길게 해 보자. 반성부터 한다. 혹시나 나 역시 “항쟁이라는 말을 너무나 신성하게 여기는 담론들이 많아”지는 데 일조하지 않았는지, 그래서 5·18 담론이 “도리어 사람들을 짓누르는 속박과 두려움이 되고 있는”(15회) 상황에 책임은 없는지 말이다. 그럼에도 광주의 신진 연구자들이 ‘예외 없이’ 5·18을 발언 주제로 삼거나, 곁가지로라도 언급하는 현상은 내게 징후적으로 읽힌다. 아마도 두 가지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겠다.

하나, 5·18이 ‘마르지 않는 샘’이기 때문. 나는 언젠가 5·18을 두고 ‘무한 텍스트’란 명명법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이런 의미였다. 5·18에는 흔히 말하는 ‘민주·평화·인권’보다도 ‘항상 더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고. 사회학자 최정운이 ‘절대공동체’라고 부르기도 했거니와, ‘완전히 다른’ 공동체의 가능성이 그 안에 있을 수도 있다고. 심지어 기념과 보상 과정에서 벌어진 부정적 행태들까지도 반면교사의 형태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많다고.

둘, ‘광주모더니즘’의 필자들 또한 부정적인 방식으로나마 5·18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 가령 나는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국가폭력과 같은 외부의 강제에 더이상 당하지 않고 살겠다는 논리가 한편으로 배타적인 관계 네트워크가 내부에 똬리를 틀도록 만든 것이다. 5·18과는 아무 상관 없이 이루어진 이런 분위기는 그저 파워엘리트의 ‘파워’를 강화하고 ‘자리’를 꿰찬 자들의 지위와 권력을 강화하는 논리만을 제공하게 만들 뿐이었다.”(11회) 최근 광주 학동 건물 붕괴사고의 전말을 아는 사람이라면 저 말의 충심을 의심하기 힘들다. 그러나 설사 어떤 환자의 의처증에 마땅한 증거가 있다 하더라도, 그가 과도한 감정 지출로 고통스러워한다면 그 또한 증상이라고 말한 사람은 지제크다. 나는 저 문장의 어투에서 어떤 ‘원한’ 같은 것을 감지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기사의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다. “5·18은 다시 발명되어야만 한다.” 나는 ‘광주모더니즘’이, 원한 없이 그 일을 해냈으면 좋겠다.

글을 마치면서 조그마한 바람 하나쯤은 얘기해도 되겠지 싶다. 20회분의 기사를 읽으면서 이런 지면이 향후에도 어딘가에서는 이어졌으면 싶다. 굳이 한겨레가 아니라도 말이다. 광주와 부산에서 시작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 두 대도시가 한국의 가장 ‘지방적’인 특성을 갖춘 장소라고 말하기는 힘들 듯하다. 할 말이 더 많은 ‘지방’이 한국에는 많다. 그리고 누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어딘가에서 이런 작업을 이어갈 다음 필자들께서는 부디 저 모든 ‘지역적인 문제들’이 결국에는 ‘신자유주의’로 수렴한다는 사실에 좀 더 주목해 주었으면 한다. 지역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감각은 존재하나, 신자유주의는 지방과 중앙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즐겁게 많이 배운 경험이었다. 진심이다. <끝>

김형중ㅣ조선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저서로 <후르비네크의 혀>,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평론가 K는 광주에서만 살았다> 외 다수. 팔봉비평문학상, 소천비평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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