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누리 칼럼] 공정의 덫에 걸린 한국 사회

한겨레 2021. 9. 14.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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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누리 칼럼]과연 공정이 실현되면 한국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는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자살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가 일하다 죽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이들이 우울증에 빠져 있고,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낳지 않는 이 헬조선이 행복의 나라로 바뀔 것인가. 사회집단 간의 갈등을 의미하는 '문화전쟁'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나라가 평화의 나라로 변할 것인가.

김누리ㅣ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놀라운 일이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들이 모두 똑같은 말을 한다. 하나같이 ‘공정’을 외친다. 젊은 정치인이 ‘공정한 경쟁’을 내세워 야당 대표에 오르더니, 새로 정치무대에 등장한 유력 야당 후보는 ‘공정과 상식’을 외친다. 여당 후보도 그리 다르지 않다. 모두 공정을 앞세운다. 무슨 이런 선거가 다 있는가.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 이 사회가 너무도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불공정과 특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폭발 직전에 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대선 후보들이 모두 공정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는 현상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다. 나는 모두가 공정을 외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공정은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는 논리처럼 보이지만, 깊은 의미에서 보면 그들의 특권을 지켜주는 담론이다. 대선 후보들이 너나없이 공정을 외쳐대는 것은 그들이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과연 공정이 실현되면 한국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는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자살하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동자가 일하다 죽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이들이 우울증에 빠져 있고, 세계에서 가장 아이를 낳지 않는 이 헬조선이 행복의 나라로 바뀔 것인가. 사회집단 간의 갈등을 의미하는 ‘문화전쟁’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나라(입소스, 킹스칼리지 공동조사 2021)가 평화의 나라로 변할 것인가.

국민의 고통과 불행이 극단으로 치닫는데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들의 현실인식은 너무도 한가하고, 원인 진단은 너무도 안이하다. 불공정이라는 반칙을 바로잡는다고 이 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겠는가.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는 불공정이 아니라 불평등이다. 이렇게 불평등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오랫동안 경제적 불평등의 대명사였던 멕시코와 미국도 추월한 지 오래다. 우리의 생활 세계도 불평등이 만연해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수도권과 지방 사이의 불평등과 차별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었다. 학벌, 성별에 따른 불평등도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도 이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 정말 이상한 나라가 아닌가. 이런 불평등한 나라에서 공정만을 외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정해지면 자연스럽게 평등해지는가. 공정의 이념이 실현된다면, 한국 사회는 ‘불공정한 불평등사회’에서 ‘공정한 불평등사회’로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공정한 불평등사회는 어쩌면 불평등을 더욱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사회로 타락할 수도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세계 최악의 불평등 국가를 개혁하는 선거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선거판 어디에서도 이런 문제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한국 사회는 지금 공정의 덫에 걸려 있다. 대통령부터 여당 후보에서 야당 후보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똑같다. 불평등은 말하지 않고 공정 타령뿐이다.

공정이 한국 사회에서는 정의의 덫이 되었다.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공정만을 외치는 것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공정은 엄격한 시각에서 보면 사회적 기득권자의 논리이다. 불평등과 차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외쳐야 할 것은 절차적 공정이 아니라, 사회적 정의이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는 공정이 정의를 가로막는 알리바이로도 기능한다. ‘조희연의 정의와 감사원의 공정’(김종영)을 보라. 정규직 전환을 둘러싼 수많은 논란을 보라. 공정 논리가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할 때 동원되는 것이다. 그 결과 약자들의 정당한 권리 구제조차 불공정하다고 공격하는 사회가 되었다. 정부가 할 일은 공정한 경쟁의 심판 역할이 아니라, 평등한 사회, 정의로운 국가를 만드는 것이다. 공정 논쟁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고 온 이 전대미문의 불평등사회에서 공정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부도덕한 짓이다. 그것은 불의가 지배하는 곳에서 혁명가가 아니라 지배자가 되라고 설교하는 것이고, 형식적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불평등사회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며, 모든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며 경쟁의 패자를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국가에 면책특권을 주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말하는 공정은 정의를 구현하는 공정이 아니라, 정의를 무력화하는 공정이다. 그것은 그저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적 교환 절차’(최종렬)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는 공정의 덫에 걸려 정의의 들판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공정 이데올로기의 감옥에 갇힌 수인이다. 정치인들은 언제까지 국민을 거짓 이데올로기의 감옥에 가두어두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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