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문제라고 생각했어요"..성소수자에게 특히 가혹한 한국의 학교

오경민 기자 2021. 9. 1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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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휴먼라이츠워치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어요:성소수자 학생의 권리를 도외시하는 한국의 학교들’ 보고서 표지. 휴먼라이츠워치 제공.


동성애자인 김도현씨(25·이하 모두 가명)는 학창 시절을 돌아보면 내내 우울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교실에서 다 함께 영화를 본 뒤 한 친구가 “동성애자는 다 총으로 쏴죽여야 한다”고 말했고, 같은 반 친구들은 그 말에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교사는 그 발언을 지적하거나 막으려 하지 않았다. 김씨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와의 인터뷰에서 “(성정체성을 깨달은 시기인) 중학교 때 내가 뭔가 잘못됐고, 나만 이상하다는 생각에 혼자 운 적도 많았다”고 말했다.

1997년 성소수자 활동가들이 중·고교 교과서에 담긴 동성애 혐오 표현에 대해 항의 시위를 최초로 벌인 이후 20년 넘게 지났다. 그러나 휴먼라이츠워치는 14일 발표한 ‘성소수자 학생의 권리를 도외시하는 한국의 학교들’ 보고서에서 여전히 학교에서는 성소수자 청소년들에 대한 인권 침해가 체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에 상관없이 모든 아동과 청소년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생활하며 교육받을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면서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겪는 문제는 정부와 학교 당국의 무대응으로 인한 것일 뿐 아니라 차별과 고립을 적극적으로 조장하는 정책의 산물”이라고 진단했다. 보고서에는 현재 20대 초중반 또는 중·고교생인 성소수자 26명과 교직원, 상담사, 단체 활동가 등 41명의 인터뷰가 담겼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학생들은 하루 평균 14시간을 학교와 학원에서 보내기 때문에 또래 집단에서의 따돌림 등에 따른 고립감이 더욱 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상엽씨(24)는 인터뷰에서 “고등학교 때 같은 반 남학생에게 좋아한다는 사실을 고백한 후 아우팅(성정체성이 타인에 의해 강제로 공개되는 것)을 당했다”고 했다. 그때부터 다른 학생들과의 관계까지 깨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반 친구들은 성소수자 비하 발언을 하면서 그를 괴롭혔다. 화장실에서 발에 채이기도 했다. 조지훈씨(25)는 체육시간에 옷을 갈아입을 때 “예쁘게 생겼다, 여자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다른 학생들이 팬티를 벗기려고 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른바 ‘남자답다’ ‘여자답다’고 여겨지는 성별규범에 맞지 않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양성애자인 문해원씨(21·가명)는 “중학교 때 (급우들이) 특히 여자 같은 남자애들을 ‘레즈’나 ‘게이’라고 부르면서 괴롭히거나 희롱했다”고 기억했다. ‘너 게이 같다’는 말은 욕설의 다른 표현이었다.

또래뿐 아니라 교사들도 거리낌 없이 혐오·비하 발언을 내뱉었다. 김도현씨는 “고등학교 때 윤리 선생님이 음양을 설명하면서 ‘동성애는 잘못됐다’고 하던 게 기억난다”고 했다. 성소수자들의 ‘퀴어축제’가 열리는 시기에 “동성혼이 합법화되면 수간도 합법화될 거다. 동성애가 얼마나 더럽고 난잡한지 아느냐”라며 한참을 설명한 교사도 있었다고 한다.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돼 있지만 이들이 도움을 요청할 만한 곳은 거의 없었다. 성정체성이 알려질까봐 상담이나 신고를 하지 않고 참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상담교사들이 내 비밀을 지켜줄지, 청소년 성소수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의심이 들었다”(G 학생)는 것이다. 보고서에는 상담교사가 성소수자에게 “전환치료(동성애·양성애자를 이성애자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치료)를 받아보라”고 제안하거나 “성소수자가 되는 것은 비도덕적인 일”, “조금 더 크면 이성애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 사례들이 담겨 있다.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과 터 놓고 도움을 받기 어려운 현실로 인해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정신건강 문제를 겪기도 쉽다. 청소년위기지원센터 ‘띵동’에 따르면, 이 단체가 2016년부터 5년간 청소년 성소수자와 진행한 2813건의 상담 중 823건(29.3%)이 정신건강 문제와 관련한 것이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한국 정부에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관한 조항을 포함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면서 “교육부는 이 같은 유형의 괴롭힘을 명시적으로 금지하고 학생들에게 비밀을 보장받으면서 효과적으로 신고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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