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갚으라 연락올까 봐".. '폐업'해도 업종 바꿔 사업자번호 지키는 소상공인들

박소정 기자 2021. 9. 14.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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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종 변경 쉬운 '통신판매업'으로 정정신고 꼼수 퍼져
폐업 시 '일시상환'이 원칙인 탓에 생긴 기현상
금융위·신보 "폐업 소상공인 대출 부실처리 유보, 연장 논의"
운영해오던 식당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업종을 통신판매업으로 바꿔 사업자 정정신고를 하니 사업자등록번호가 유지됐어요. 폐업했다고 하면 대출금을 은행에 일시에 상환해야 하니까, 이렇게 해서 하루이틀이라도 더 버티려는 겁니다.
자영업자 A씨

최근 자영업자들 사이에서 실질적으로는 폐업을 했어도 업종만 정정하는 일종의 ‘꼼수’로 명목상 사업자등록번호를 유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폐업 신고를 하지 않고 사업자등록번호를 유지하면 은행 등 금융사로부터 상환 연락을 받지 않고 기존 대출도 문제 없이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이 중소기업·소상공인 대출 만기 연장과 이자 유예 조치 연장을 두고 고심하는 가운데, 차주의 상환 능력을 가늠할 최소한의 척도인 ‘폐업 현황’마저 이런 방식으로 왜곡되면서 대출 부실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14일 금융권과 업계 등에 따르면, 최근 소상공인들 사이에서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 영향으로 실제로 운영하던 가게의 영업을 접었어도 사업자등록번호를 유지하는 방법들이 공공연하게 퍼지고 있다. 사업장 주소를 집 주소로 바꾸고 일반음식점 등 기존 업종을 통신판매업 등으로 바꾸는 방식이다. 실제로는 영업을 하지 않으면서도 사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지난달 5일 오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장기화의 여파로 폐업한 서울 시내 한 음식점에서 주인이 주방용품을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세무업계 관계자는 “통신판매업자나 개인과외교습자 등은 주거지가 사업장으로 인정되는 업종으로 정정하기가 비교적 쉽다”며 “이런 정정신고는 국세청 홈택스 홈페이지를 통해 1~2일이면 간단하게 이뤄지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사업자 자격으로 돈을 빌린 차주는 원칙적으로 폐업을 하면 이를 즉시 모두 상환해야 한다. 코로나 대출의 자격 요건이 소상공인에 해당하는 법인 또는 개인사업자여서, 사업자 자격을 잃는 순간 대출의 자격마저 잃게 되는 탓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 등 금융사 입장에서는 폐업 여부나 매출액 발생 등의 동향을 대출 만기 연장 때나 들여다 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사업자등록번호만 유지돼 있으면 문제 없이 대출을 이어나갈 수 있다”며 “가게는 장사를 접고 내놓긴 했는데 일시에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될까 불안한 소상공인들이 이런 방식까지 동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자영업자의 대출은 급증하는데, 폐업 여부나 연체율 등 대출의 부실 징후를 가늠할 지표들은 거의 무용지물이 돼 버린 상황이다. 지난 8월 말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개인사업자 대출 잔액은 292조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7.8% 증가했다. 최근 문제로 지적되는 가계대출 증가율(5.8%)보다 높았다. 이런 대출의 건전성을 확인할 지표는 정부의 대출 만기연장·원리금 상환유예 등 지원 조치로 착시현상을 보이며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은행의 개인사업자 대출 연체율은 지난 6월 말 0.18%로 지난해 말보다 오히려 0.03%포인트(P) 떨어졌다.

금융당국이 이달 종료될 예정이었던 중소기업·소상공인 ‘코로나 금융지원 프로그램’을 최근 세 번째 연장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하는 분위기와 맞물려, 돈을 빌려준 금융사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금융당국은 대출 만기는 종전처럼 6개월 재연장하는 방안을 유력 검토 중인데, 이자 유예 조치는 은행권의 강력한 반발로 더는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한 은행 관계자는 “대출 금리가 올라 은행들은 향후 건전성을 더욱 우려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며 “이런 상황에서 차주의 상환 능력을 은행이 파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이자 상환 현황)라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원리금 연체 없는 폐업 소상공인을 위해 금융위원회가 마련한 부실처리 유보 대책. 당초 계획대로라면 오는 30일 마무리될 예정이었으나, 금융위와 신용보증기금이 연장 여부를 논의하고 있다. /조선DB

일각에선 소상공인들이 정석대로 폐업 신고를 하고도, 돈을 안정적으로 갚아나갈 수 있는 방법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금융당국은 지난 2월 원리금을 정상적으로 상환 중인 폐업 소상공인을 대상으로 대출금을 즉시 회수하지 않고 부실 처리를 유보하는 지원책을 시행했는데, 시행 기간이 오는 30일까지로 보름 밖에 남지 않았다. 신용보증기금 관계자는 “해당 조처를 연장할지 여부를 현재 금융위원회와 함께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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