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나요? '사후 세계'의 모든 것 [왓칭]
웰메이드 사후세계 시트콤
NBC 드라마 '굿플레이스(Good Place)'
도덕과 철학도 재미있을 수 있다
어느 날 눈을 감았다 번쩍 떠보니 낯선 곳이다. 눈 앞엔 이런 문구가 보인다. “환영합니다! 다 괜찮습니다”. 누군가 나타나 설명한다. 당신은 어떤 이유로 죽었는데, 여기는 가장 순수한 인간의 영혼만이 도달하는 ‘좋은 곳’이니 안심하라고. 당신이 가장 편안해지는 장소와 환경에서,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필요한 건 뭐든 가져다준다고. 무한한 시간이 지루할까 봐 이곳에선 나의 영혼과 마지막까지 함께 할 ‘소울메이트’도 짝지어 준다.
여기가 바로 천국일까? 종교와 신념에 따라 각자 바라는 천국의 모습은 다를 것이다. 죽음 이후의 상태를 정확히 묘사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누군가는 죽음으로서 비로소 무(無)의 세계로 돌아간다 믿을 것이고, 누군가는 신의 부르심에 따라 영생을 얻어 상급을 누리며 사는 세계를 꿈꿀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죽음을 맞을 것이란 사실만큼은 모두에게 같다. 죽음은 우리의 존재 이유, 그리고 삶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
미국 NBC 드라마 ‘굿플레이스’는 본격적으로 사후 세계를 다루는 시트콤이다. 윤리와 철학의 관점으로 ‘굿 플레이스(Good Place)’ ‘배드 플레이스(Bad Place)’란 가상의 세계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린다. 삶과 죽음, 도덕과 철학을 재치있게 그려내 뉴욕타임즈 등 다수 언론이 ‘TV 최고의 시트콤’이라고 평가했다. ‘디 오피스’ ‘브루클린 나인나인’으로 유명한 마이크 슈어가 각본을 쓰고 제작했다. 시즌 4까지 제작됐는데, 모든 시즌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흔치 않은 작품이다.
드라마는 미국 아리조나 출신의 한 여성, 엘리너 셸스트롭의 시점으로 시작한다. ‘굿 플레이스’에 도착한 앨리너는 사실 이곳에 와선 안 되는 밑바닥 인생이다. 노인들에게 겁을 줘 가짜 약을 파는 회사에서 그는 7년 간 우수사원이었다. 배려나 양보, 남을 위한 일이라곤 해본 적 없고 주변에 민폐만 끼친다. 죽음은 그의 생애 만큼이나 한심했는데, 마트에서 연예인 가십잡지와 술을 사서 나오며 환경보호단체 직원에게 시비를 걸다가 트럭에 치여 죽는다.
그런 주인공이 어떤 시스템 상의 오류로 위인급 업적을 쌓아야만 갈 수 있는 ‘굿 플레이스’에 뚝 떨어진 것이다. 게다가 주인공의 소울메이트는 세네갈 출신의 지루한 윤리학 교수다. ‘치디 아나곤예’는 도덕 철학에 푹 빠져 매 순간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완벽한 선택을 하기 위해 고뇌에 시달려온 사람이다. 엘리너는 치디에게 도덕 철학을 배우며 ‘굿 플레이스’에 어울리는 착한 사람이 되어보기로 한다.
그러나 완벽한 구성원들 사이에서 엘리너는 눈에 띄게 이질적이다. 존재 자체로 시스템 오류인 주인공 때문에 굿 플레이스는 점점 망가져 간다. 여기서 드라마는 첫번째 도덕적 질문을 던진다. 엘리너는 이곳에 자신이 실수로 잘못 떨어졌음을 밝혀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을까? 그 사실이 알려지면 그는 곧바로 ‘배드 플레이스’로 떨어져 무한한 시간 동안 개인 맞춤형 고문을 받아야 한다. 사람을 죽이거나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 평범한 악을 저지르며 살아온 그에게 어쩌면 천국과 지옥 그 중간 어디쯤의 평범한 공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다양한 종교와 인종이 모인 미국에서 사후세계를 그린 드라마가 이렇게 성공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나 매 회 웃음이 터져야 하는 시트콤으로 만든다는 건 도박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의 성공은 어느 종교의 사후세계도 건드리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드라마에선 힌두교,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 불교 모두 5% 정도만 맞췄다고 묘사한다. 기독교적 의미의 ‘천국’(heaven)이나 ‘지옥’(hell)이란 개념 대신 ‘굿 플레이스’와 ‘배드 플레이스’로 나뉜다.
‘제러미 베러미’라는 복잡하고 독자적인 시간의 흐름을 가진 이 사후세계에선 인간이 지구에서 보낸 찰나의 시간동안 저지른 모든 일이 수치로 기록된다. 모든 행동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도덕적 가치를 가진다. 그 행동이 우주에 얼마만큼의 선과 악을 추가했는가. 그 행동 뒤에 숨은 의도는 무엇이고 다른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지 계산한다. 참고로 노예제도를 끝내 814292.09점을 얻어 굿플레이스에 온 링컨을 제외한 모든 미국 대통령과 모짜르트·피카소 등 대부분 예술가는 배드 플레이스에 있다.
제작을 맡은 마이클 슈어는 두 가지 경험을 조합해 이 쇼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만일 우리의 삶이 매일 그날의 총점을 내는 거대한 비디오 게임이라면?’ 이라는 농담이었다. 그는 어느날 고속도로에서 끼어들기 하는 차량을 보며 극심한 짜증을 느꼈다. 그때 지인들과 “저건 마이너스 7점” “저건 마이너스 12점” 하고 점수를 매기는 장난을 하며 기분을 풀었다. 이게 ‘굿 플레이스’의 사후 세계 점수 시스템이 됐다.
두 번째는 어느 날 집 근처 스타벅스에서였다. 그는 매일 가장 저렴한 1.7달러짜리 커피를 마시며, 잔돈 30센트를 팁을 담는 통에 넣었다. 생색 내기도 민망한 적은 액수지만, 그는 꼭 파트너가 등을 돌려 자신을 볼 때까지 팁을 넣지 않고 기다렸다. “인정받기 위해 하는 착한 행동이 과연 정말 선한가?”. 그 순간 떠오른 생각으로 이 시트콤의 기본 뼈대를 만들었다.
그는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질문한다. 좋은 사람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못된 인간도 노력하고 공부하면 착해질 수 있을까. 남과 관계를 맺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사회는 점점 각박해지는데, 인간은 어디에 희망을 두고 살아갈 것인가. 무한히 행복할 수 있는가. 어떤 행동의 목적이 선하다면 반드시 사회에 도움이 되는가.
재미 없는 질문들이지만 드라마는 딱딱하게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에피소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코미디로 소화한다. 주인공인 윤리학 교수 치디는 칸트의 ‘광팬’이다. 시트콤엔 칸트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 존 로크, 니체, 데이비드 흄, 피터 싱어, 주디스 슈클라 등 철학자들과 ‘공리주의’ ‘정언명령’ ‘효율적 이타주의’등 철학적 개념들이 줄줄이 등장한다.
마지막 시즌까지 주인공 엘리너가 손에서 놓지 못하는 책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의무(팀 스캔런)’는 이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다. 이런 개념들을 지루하지 않게 풀어가기 위해 전문가들이 동원됐다. 캘리포니아대 철학과 교수인 파멜라 히에로니미와 미국 클렘슨 대학 철학과 토드 메이가 참여해 세계관을 구성했다.
사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라 했지만, 이 작품에선 다르다. 플로리다 출신 범죄자 제이슨, 오만한 사교계 명사 타하니, 원리 원칙만 강조하며 남을 괴롭히는 치디, 이기적인 엘리너. 이들 주인공들은 알고 보면 모두 결함 많은 인간들이다. 이들이 모여 있으면 그야말로 ‘지옥’이 될 것 같지만, 결국 이들은 서로를 돕고 구원한다. 인간이 서로 돕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과정, 그 자체가 삶의 이유이고 희망이란 걸 보여준다.
시트콤이 사후세계를 다루면서도 완전한 죽음 그 너머의 세계를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둔 점도 인상적이다. “필멸(必滅)은 우리 삶의 순간에 의미를 주고, 도덕성이 그 의미를 찾도록 돕는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그들은 무한한 행복과 영생 대신 ‘끝’을 갖기로 한다. ‘끝’이 무엇인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늘 조금씩 슬퍼요.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게 바로 인생을 의미 있게 해줘요”.
Stream?
-자극적인 화면보단 잔잔하고 편안하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좋다면, 가볍지만 주제와 문제의식이 뚜렷한 드라마를 찾는다면 추천한다. 윤리와 철학에 푹 빠져 있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긴 시간 몰입해야 하는 대작이 싫다면. ‘굿 플레이스’는 일부 시즌의 처음과 마지막 회차를 제외하면 모든 회차가 정확히 22분인 짧은 시트콤 형태다. 부담 없이 가볍게 볼 수 있다.
-드라마로 영어공부를 하고 싶다면. 주인공 크리스틴 벨은 연극을 전공한 미국 배우다. 겨울왕국에서 ‘안나’ 역의 목소리를 맡았다. 그의 정확하고 또렷한 발음과 풍부한 어휘 덕분에 ‘영어공부 드라마’로 유명해졌다.
Skip?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로 가득한 드라마가 싫다면. 주인공 엘리너와 주변인들의 이야기는 장면보단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사로 흘러간다. 여백이 없다. 세 번째 시즌쯤 되면 살짝 지루해진다는 평도 있다. 시즌 3 중간에 지루해진다는 평이 있다.
-스펙타클한 액션이나 화려한 볼거리가 필요하다면.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고 건전하다. 눈길을 사로잡는 연출이나 영상미에 끌리는 이들이라면 이 드라마를 심심하게 느낄 수도 있다.
개요 드라마 l 미국 l 2016~2020년 l 시즌 1~4 l 회당 20~30분 내외
등급 18세 이상 관람가
특징 압도적 완성도의 판타지 사후세계 시트콤
평점 로튼토마토지수 🍅97%, IMDb⭐8.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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