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전도사’ 故조용기 목사… 지구 120바퀴 전도 여행, 5천명 심장병 수술도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1. 9. 1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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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14일 오전 별세했다. 사진은 지난 2009년 성탄절을 앞두고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조용기 목사. /오종찬 기자

조용기 목사는 한국 개신교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인공이다. 1960년대 ‘희망’을 설교한 그의 교회에는 구름 인파가 몰렸고, 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한국 사회와 함께 성장했다.

첫 목회지는 서울 은평구 대조동. 훗날 장모가 된 최자실 전도사의 집 거실이었다. 1958년 5월 18일 당시 조용기 전도사, 최 전도사와 자녀 그리고 밭일하다 비를 피해 들어온 이웃 주부 등 5명이 사과 상자를 보자기로 덮은 강대상을 놓고 예배를 드렸다. 이어 대조동 언덕 깨밭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다.

서울 은평구 대조동 천막 교회 시절 산소통을 종 대신 사용하던 조용기(오른쪽) 목사와 장모인 최자실 전도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시작은 미약했지만 목회 초반부터 ‘조용기 신드롬’은 뜨거웠다. 당시 은평구 일대는 영호남에서 먹고살려고 상경한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당시 개신교계의 일반적 분위기와는 달리 ‘방언(方言·성령의 힘으로 말한다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말)’과 ‘신유(神癒·신의 힘으로 병이 낫는 것)’를 강조한 조 목사의 ‘뜨거운 목회’는 이단 논쟁도 불렀지만 신자 수 급증으로 이어졌다. 창립 3년 만에 서대문로터리에서 부흥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교회를 이전했다.

1950년대 말 신문지를 벽지로 붙인 천막 교회에서 조용기 전도사가 외국인 선교사와 설교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이어 1973년엔 국회의사당과 시범아파트 외에는 허허벌판이던 여의도에 교회를 신축해 옮겼다. 조 목사는 지난 2018년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본지와 한 인터뷰에서 “평생 가장 기뻤던 일이 여의도 예배당 입당”이라고 말했다. 당시 오일쇼크 여파로 공사가 수차례 중단됐지만 오히려 신자는 늘어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고 했다.

여의도 이전 후 교회 이름도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바꿨다. 이때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 신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입당 당시 1만명이던 신자는 1979년 10만명, 1984년 40만명을 넘어섰고, 1992년엔 70만명을 넘어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 교회로 등재됐다.

199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에서 조용기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조용기 목사의 목회 스타일은 ‘희망 목회’로 불린다. 조 목사가 목회의 첫걸음을 내딛던 1960년대는 한국 경제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때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농촌을 떠나 서울로 시민들이 몰리는 이농 현상이 본격화했다. 이 시기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어렵게 뿌리내리던 이들에게 조 목사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며 ‘희망’을 설교했다. 조 목사는 생전에 “저 스스로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가난에 한이 맺혀 천당과 지옥 이야기보다는 용기와 희망을 설교하려 애썼다. 부자 교회 못 가고 우리 교회 온 가난한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고 위로를 받는 것이 제게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 성장의 비결로 ‘여성 구역장의 활약’을 꼽기도 했다. 여성들이 전도 일선에 나서고 평신도 조직의 책임을 맡으면서 비약적 성장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등 기업인들이 세계 시장을 누빌 때 조 목사는 지구 120바퀴 거리를 날아 세계 선교에 나섰다. 대조동 천막 교회 시절부터 세계 선교를 꿈꿨던 조 목사는 “우리나라가 자동차, 비행기는 못 만들어도 복음과 예수를 전하는 일에서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고 한다. 조 목사의 경상도식 억양 영어 설교엔 구름 인파가 몰렸다. 브라질 상파울루 집회에는 150만명 이상이 운집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그는 ‘폴 조’ ‘데이비드 용기 조’로 유명했다.

2007년 평양에서 열린 조용기 심장병원 착공식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교회 규모가 커지면서 사회봉사 활동에도 나섰다. 1980년대부터 국내와 동남아 등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도운 것이 5000명에 이른다. IMF 구제 금융 사태로 실업자와 노숙자가 속출하던 1990년대 말에는 금 모으기 운동에도 앞장섰다. 1999년엔 국내외 구제 활동을 위한 NGO 굿피플을 창립했고, 2007년에는 평양에 심장 전문 병원을 착공했다. 그는 생전에 “병원 이름에서 내 이름은 빼도 된다”며 병원 설립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남북 관계 악화와 대북 제재 등의 여파로 병원은 아직 완공되지 못했다.

조용기(오른쪽) 목사와 후임 이영훈 목사. 조 목사는 만 70세이던 2006년 이영훈 목사를 후임으로 선출하고 담임목사직을 물려줌으로써 대형 교회 담임목사직 승계의 모범을 보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세계 최대의 교회인 만큼 한때 조 목사의 은퇴 여부가 사회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원래 교회가 속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교단의 목사 정년은 75세였다. 조 목사는 만 70세이던 2006년 당회의 투표를 거쳐 이영훈 목사를 후임자로 뽑았다. 이영훈 목사는 3년간 담임목사 서리 기간을 거쳐 2009년 2대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이 목사 취임 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지교회를 독립시켜 40만명 규모로 축소했으나 이후 다시 교인이 늘어 현재는 57만명에 이른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지난 2005년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열린‘세계 평화, 민족 구원 10만명 기도대성회’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조 목사는 희망을 불어넣는 설교로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시키고 세계 70여 국가에서 전도집회를 열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자신의 목회 인생을 한마디로 ‘기적’이라고 정의했던 조 목사는 지난 2018년 본지 인터뷰에서도 ‘희망’을 거듭 강조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꿈을 잃지 마세요. 긍정적 믿음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긍정적으로 행동하면 우리 민족은 반드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멋진 민족입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고 마음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저 위에 계시는데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고생은 반드시 따라옵니다. 고난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고난을 각오하고 나가면 미래는 이뤄집니다.”

조 목사의 유족은 희준·민제(국민일보 회장)·승제(한세대 이사) 등 세 아들이 있다. 부인 김성혜 전 한세대 총장은 지난 2월 먼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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