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가을날 따스한 노을 같은 감동

아이즈 ize 권구현(칼럼니스트) 2021. 9. 14.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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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권구현(칼럼니스트)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올해 역시 코로나19로 인해 예전과 같은 풍성한 한가위의 풍경은 요원해 보인다. 정부가 추석이 있는 1주일만큼은 백신 접종 완료자 4명을 포함, 최대 8명까지 가정 내 가족 모임을 허가했지만, 수도권 확진자의 증가세가 지역사회까지 전파될 것을 염려하며 민족 대이동을 포기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이번에도 썰렁한 한가위가 예상되는 이유다.

하지만 극장가는 힘을 내고 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집계 이래 최악이라고 불리는 작년과는 그림이 달라졌다. '모가디슈'가 여름 내내 활약하며 누적 관객 300만 명을 돌파했고, '인질'과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 코로나19로 멀어졌던 관객들의 시선을 극장으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찾아온 최고 대목 중 하나인 추석 연휴. 특히 올해는 주말과 붙어 있어 5일의 빨간 날을 부여 받았다. 이에 추석 극장가에 불황 타파의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보면 딱 좋을 영화 '기적'(감독 이장훈, 제작 블러썸픽쳐스)이 오는 15일 개봉한다.

영화 '기적'은 오갈 수 있는 길은 기찻길밖에 없지만 정작 기차역은 없는 마을의 '준경'(박정민)과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언제 기차가 올지 모르는 상황에도 철로를 오갈 수밖에 없는 봉화 마을의 주민들은 외통수인 터널을 지날 때마다, 그리고 철길 다리를 건널 때마다 위험천만한 상황을 겪는다.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난 것은 당연지사, 하여 준경은 청와대를 향해 간이역 하나를 만들어 달라는 편지를 54번이나 보낸다.

짤막한 한 줄의 팩트라도 실화에 근거할 때 서사는 힘을 받기 마련이다. 영화 '기적'은 1988년 우리나라 최초 민자역사로 기록된 경상북도 봉화의 양원역에서 시작됐다. 그렇게 영화는 작은 설정 하나를 통해 '간이역을 만드는데 성공한 어느 고교생의 실화'로 포장을 마쳤다. 하지만 진짜 알맹이는 (스포일러 때문에 언급할 수 없는) 판타지를 가미한 웃음과 감동의 가족 드라마로 가득 채워 관객들에게 선물한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무엇보다 인물들이 앙상블이 뛰어나다. 맞춤법도 엉망이고, 미국의 수도도 모르지만 숫자만 들어가면 누구보다 뛰어난 수학 천재 준경과 자신의 꿈은 '뮤즈'라며 준경을 향해 직진하는 '라희'(임윤아)가 80년대 고교생들의 풋풋한 사랑으로 미소를 유발한다. 더불어 준경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며 현실 남매의 찐 케미를 보여주는 '보경'(이수경)은 동생을 향한 무한 사랑을 통해 집안의 공기를 따스하게 데우는 난로처럼 한자리에서 빛나고 있다. 그리고 원칙주의자 기관사이자 무뚝뚝한 아버지 '태윤'(이성민)은 오랜 시간 숨겨 왔던 자신의 속내를 시나브로 열어가며 이야기를 절정으로 끌고 간다.

영화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뽐내는 건 바로 두 명의 '뮤즈' 임윤아와 이수경이다. '뮤즈'라는 단어가 여성 인권이 성장한 지금 시대와는 사뭇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라희와 보경은 작품 속에서 소모적으로 소비되는 희생양이 아니다. 미래의 꿈을 '뮤즈'라 외치며, 같은 반의 수학 천재를 성공으로 이끄는 라희는 거침없는 추진력을 갖춘 에이전트이며, 보경은 어린 준경이 성장할 수 있었던 기둥 같은 존재다. 누군가에게 영감의 대상이 되는 피동적인 '뮤즈'가 아닌 그리스 신화 속 예술의 신 '뮤즈'인 셈이다. 그리고 임윤아와 이수경은 '기적'을 일으키는 신력을 작품 속에 발휘한다.

배우 활동을 시작한 후 '공조'와 '엑시트'를 통해 흥행배우로 거듭난 임윤아. 하지만 2007년 데뷔해 15년 동안 '소녀시대'를 살아온 만큼 대중들의 뇌리 속에 아이돌의 인(印)이 강하게 찍혀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기적' 속에서 '소녀시대' 윤아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베테랑 배우들도 어렵다는 사투리 연기부터 작품 전체의 비타민과 같은 역할을 하며 자유로운 연기를 뽐낸다.

이수경은 영화가 낳은 기적이다. 전면에 드러나는 인물도 아니고, 활동 반경도 한정된 보경을 연기하며 작품 속에서 대단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러닝 타임 내내 보경이 나오는 시간만을 기다릴 정도. 품고 있는 감정선도 다양하기에 쉽지 않을 연기였다. 나아가 서사의 반전과 판타지까지 책임지고 있기에 부담도 상당했을 터, 하지만 이수경은 이를 능히 해낸다. 작품에 대한 호평과 이수경의 놀라운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저예산 영화라 많은 관객과 마주하지 못던 영화 '용순'의 아쉬움을 '기적'을 통해 완벽하게 푸는 모양새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2018년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로 데뷔한 이장훈 감독은 전작에 이어 '기적'에서도 판타지와 드라마를 아름답게 하나로 엮어냈다. 섬세한 연출을 비롯해 인간미 넘치는 유머, 그리고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감동 이야기까지, 두 편 연속 비슷한 장르의 영화를 훌륭하게 이끌며 자신만의 색채를 갖춰가고 있다. 재미있는 건 영화의 배경을 구축하는데 이성민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것. 우연히도 영화 속 배경인 경상북도 봉화는 이성민의 고향이었고, 덕분에 대본 속 사투리부터 디테일한 설정까지 이성민을 거쳐 완성했다. 예를 들어 햄버거집 데이트는 떡볶이로, 통학 버스는 자전거로 수정됐다. 88 올림픽이 열리기도 전, 간이역 하나 없던 시골 마을의 정겨운 모습들이 향수를 자극하는 건 이장훈 감독의 열린 마인드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덧붙여 신파에 대한 염려는 접어도 좋다. 눈물을 쏙 빼는 부분이 존재하지만 강제적으로 감정의 너울로 관객을 몰아세우진 않는다. 가족이라는 터울 안에 어느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갈등 요소를 재워놓고, 자연스럽게 이를 해결하며 가을날 맑은 하늘을 물들이는 따스한 노을 같은 감동으로 관객의 마음 속에 스며든다.

영화 '기적'은 대단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은 아니다. 다만 내 가족을 너무나도 아끼고 사랑하지만 그 표현을 아끼고만 있을 때, 대화를 통해 속내를 표현하라 말한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때,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따스한 감정이 바로 기적인 셈이다. 그렇게 영화는 코로나19로 인해 가족끼리도 마주하기 힘들었던 관객들에게 가족의 진정한 의미와 소중함을 다시금 일깨운다. 여러모로 이번 한가위에 가족과 함께, 혹은 가족을 생각하며 보면 너무나도 좋을 영화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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