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성소수자 괴롭힘, 무대응과 차별 조장 정책의 산물"

박고은 2021. 9. 1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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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라이츠워치 성소수자 괴롭힘 보고서
친구, 교사 모두 괴롭힘의 가해자
정신건강 위기 심각하지만 지원은 없다시피
클립아트코리아

“한 친구가 ‘동성애자들은 다 총으로 쏴죽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선생님은 그런 발언을 막지 않았고, 다른 애들은 그냥 웃었어요. 저는 너무 화가 나서 교실 밖으로 나와버렸어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14일 한국의 성소수자 학생들이 학교에서 겪는 괴롭힘 문제를 담은 보고서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어요-성소수자 학생의 권리를 도외시하는 한국의 학교들’을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휴먼라이츠워치와 예일대학교 법과대학 앨러드 K. 로웬스타인 국제인권클리닉이 지난 2019년 2월부터 올해 5월까지 성소수자 고등학생 및 최근 졸업생 26명, 일반 교사·교직원·학부모·지원단체 활동가·교육전문가 등 41명을 인터뷰한 내용이 담겼다.

보고서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이 경험하는 괴롭힘과 차별은 정부의 무대응으로 인한 문제일 뿐 아니라, 차별과 고립을 조장하는 현 정책들의 산물”이라고 지적했다.

언어폭력부터 사이버 괴롭힘까지

ㄱ(24)씨는 고등학교 재학시절 같은 반 친구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그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전체에 퍼졌다. 그때부터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가 깨지기 시작했다. 반 친구들은 성소수자 비하 발언을 하며 ㄱ씨를 괴롭혔다. 화장실에서 물리적 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절망스럽고 숨 막혔지만 도움을 요청할 어른이 주위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트랜스젠더 ㄴ(25)씨는 중학교 때 반 친구들로부터 언어폭력을 당했다. 반 친구들은 그가 정체성 문제로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옆에 앉아 성소수자나 에이즈 감염자에 대한 비하 발언을 늘어놨다. ㄴ씨는 “그런 말을 그냥 가슴에 담고 집에 갔다. 그때는 내가 더럽다고 생각해서 씻고 또 씻었다. 나한테서 그 더러운 걸 벗겨내고 싶었다”고 했다.

보고서는 성소수자 학생들이 당하는 괴롭힘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했다. 배제, 언어적 괴롭힘, 사이버 폭력, 물리적 폭력 또는 성폭력 등이다.

인터뷰에 참여한 성소수자들은 다양한 피해 경험을 증언했다. 한 피해자는 친구가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전교생에 알리는 일을 겪었다. 그뒤 아무도 그와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남학교를 다닌 한 피해자는 “체육시간에 갈아입을 때 여자처럼 생겼다며 다른 학생들이 속옷을 벗기려 했다”고 증언했다. 사이버 폭력을 당한 사례도 있었다. 송지은 청소년 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띵동 활동가는 “에스엔에스에서 아웃팅된 청소년 성소수자의 경우 ‘얘 누구누구랑 잤다’ ‘얘 몇 명이랑 잤다’와 같은 댓글에 시달리기도 한다”고 했다.

교사가 성소수자 학생 괴롭힘의 가해자인 경우도 드물지 않다. 한 피해자는 교사들이 ‘너 게이냐? 너 레즈냐?’ 등의 농담을 했다면서 그런 분위기때문에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감추게 됐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피해자는 교사에게 괴롭힘 사건을 신고했다가 “여자가 되어서 괴롭힘을 중단시켜줄 남자친구를 만들라”는 얘기를 들었다. 수업시간에 교사가 “동성애는 잘못됐다” 등의 발언을 한 사례도 있었다.

청소년 성소수자를 상담하는 이성원 심리상담가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직면하는 가장 큰 문제가 비가시성”이라면서 “아이들은 그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데, 교사들이 관련 지식이나 배경이 없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는 그런 아이들 없다’고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괴롭힘은 그 형태에 무관하게 성소수자 학생들의 건강과 권리를 심각하게 위협한다”고 했다. 띵동이 지난해 발표한 청소년 성소수자 상담 사례 2055건 분석 결과를 보면 자해나 자살 위험이 포함된 상담 건수는 12.4%였다.

어디에도 청소년 성소수자 정신건강 지원은 없어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상담 같은 것도 받을 수 없었어요. 내가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죠.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왜 남자를 좋아할 수 없나’ 생각하며 우울해 했어요.” (인터뷰 참여자)

한국의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정신건강 문제로 고통받고 있지만 정신건강 서비스를 이용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정신건강 서비스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학교마다 차이가 있다. 2008년 교육부의 위기학생 상담 정책인 WEE 프로젝트 시행에도 불구하고 상담교사가 아예 없는 곳도, 일반 교사가 상담 교사 역할을 하는 곳도 있다. 상담교사가 상주하는 학교도 있지만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송지은 활동가는 “상담교사들이 잘못 알고 있거나 편견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보니 결국 성소수자 학생에게 2차 피해를 입히게 된다”고 했다. 그 사례로는 상담교사가 학생에게 전환치료를 제안하거나, 성소수자가 되는 것은 비도덕적인 일이라고 말하거나, 더 크면 문제가 없어질 것이라고 하는 등이 있었다.

보고서는 “적절한 교육과 책임성이 부재한 상태에서 학교의 상담 교사들은 지원을 필요로 하는 청소년 성소수자들에게 믿을 수 있는 자원이 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학교 밖 자원도 마찬가지다. 여성가족부는 1388 청소년 상담전화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상담원들이 청소년 성소수자를 지원할 역량은 부족하다. 정부가 청소년 성소수자 지원과 관련한 의무 교육과정을 채택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휴먼라이츠워치가 인터뷰한 청소년들은 1388 상담전화가 도움이 안되거나 성소수자가 되는 것을 단념시키려 했다고 증언했다.

보고서는 “정부와 학교, 기타 공중보건제도가 충분한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 상황에서 청소년 성소수자들은 어쩔 수 없이 비공식적인 네트워크에 의존해 정신건강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자원이 저렴하고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공식 프로그램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한국 정부에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관한 조항을 담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다. 특히 교육부에는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포용하는 괴롭힘 및 차별 금지 정책 개발 △WEE 프로젝트에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관련 자료 통합 △성소수자 학생들의 사생활과 기밀성 존중 △학내 상담제도 등 학교 내에서의 정신건강 지원 프로그램 운영 강화 등을 권고했다. 여성가족부에는 1388 청소년 상담전화 등 학교 밖 정신건강 프로그램이 청소년 성소수자를 지원할 수 있도록 관련 프로그램 지침과 교육 매뉴얼을 수정할 것 등을 권고했다.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라이언 토레슨 휴먼라이츠워치 연구원은 14일 화상으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어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특히 선생님들이 성소수자 혐오발언을 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면 그 기억은 아이들에게 평생 남는다. 선생님들이 성소수자 이슈에 대해 교육받을 수 있도록 정부가 제도화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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